[정숭호의 키워드] 의충법-나는 무슨 벌레가 돼가는 걸까

입력 2017-03-0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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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의인법(擬人法)’과 ‘의충법(擬蟲法)’이 넘쳐난다.

먼저, ‘의인법의 범람’. ‘대세 아이돌 걸그룹’ 멤버 하나가 강아지를 데리고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다. 성격이 어떠냐고 묻는 MC(여자)에게 “얘는 귀엽지만 앙칼져요. 낯도 엄청 가려요”라고 대답한다. MC가 “예쁘다”고 하자 “얘, 이모가 너 예쁘댄다”라며 쓰다듬는다. MC는 개 이모가 된 게 아무렇지도 않다.(이렇게 말하는 내가 이상한가?) “전에 데리고 나온 애는 어디 있어요? 걔도 예뻤는데….” “아 걔요? 아파서 두고 왔어요. 속상해요.”

개 이야기를 하면서 MC나 출연자나 똑같이 개를 ‘얘’, ‘쟤’, ‘걔’라고 부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취급이다. 한 번도 ‘이놈’, ‘저놈’, ‘그놈’이라고 하지 않는다. ‘수놈’, ‘암놈’도 없고, ‘남자’, ‘여자’만 있다. “얘는 남자만 오면 꼬리를 치는데, 여자여서 그런가 봐요”는 ‘이놈은 암놈이어서 남자(사람)를 보면 꼬리를 친다’라는 뜻이다.

개는 물론, 고양이, 돼지, 뱀, 이구아나, 햄스터, 앵무새 등등 모든 애완동물이 사람 대접을 받더니 자동차, 옷, 구두 따위도 인칭대명사를 덮어쓴다. 자동차에는 “얘는 연비가 좋아요. 힘도 넘쳐요”, 옷에는 “쟤는 신축성과 보온성이 높아요”, 구두에는 “걔는 완전 신상이잖아요, 트렌디하고…”라고 말한다. ‘이것’, ‘저것’, ‘그것’은 사라졌다.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무, 파, 고기 따위 재료들을 늘어놓고는 “물이 끓으면 얘 먼저 넣고, 살짝 익었다 싶으면 다음엔 쟤를 넣으시고, 마지막에 걔네들을 다 넣으세요”라고 시킨다.

의인법 사용만 많아진 게 아니다. 의충법도 부쩍 늘어났다. 나의 다른 글에서 이미 소개한 게 많아 멋쩍지만, 의충법 사례 몇 가지를 옮겨 본다.

맘충 -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

급식충 - 학교에서 급식 시간만 기다리는 아이.

진지충 - 온갖 일에 진지하게 나서는 사람.

극혐충 - 극도로 미운 사람.

설명충 - 온갖 일을 설명하고 나서는 사람. 진지충과 DNA가 거의 겹친다.

일베충 - 극우 보수적 사이트인 일간베스트를 근거로 활동하는 사람.

▲고양이 얘네들은 주인, 아니 집사를 우습게 아는 것 같다.
▲고양이 얘네들은 주인, 아니 집사를 우습게 아는 것 같다.

자기 글에서 틀린 걸 애써 고쳐 수준 높게 만들어주는 사람을 ‘교정충’ 혹은 ‘문법충’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한마디로 의충법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벌레로 간주하는 표현법이다. 싫어하는 사람이나 행위-옳거나 그르거나 상관없이-에 ‘벌레 충(蟲)’ 자만 붙이면 의충법은 완성된다. 사람과 벌레의 구분은 오직 자기 기준, 자기 눈에 보인 것을 따른다.

요즘 새로 나타난 벌레는 ‘틀딱충’이다. ‘딱딱거리며 잔소리하는 틀니 낀 노인들’을 일컫는 말인데, 태극기 집회가 거듭되면서 거기 참여하는 노인들을 이렇게 부르는 젊은 것들이 많다. 일베충이 진화해 틀딱충이 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노인들은 조어 능력이 떨어져 반대편 젊은이들을 ‘~충’이라고 하고 싶어도 못한다. “애비 어미도 모르는 짐승 같은 것들”이라고 맞설 뿐이다. ‘벌레들의 싸움’이 안 된 게 그나마 다행인가.

이게 모두 자기처럼 생각하고, 자기처럼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만 인격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 다른 느낌이면 인격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벌레 충’이고, 짐승 같은 것들이다. 하여튼,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웬만큼 관심 갖고 아끼는 것은 사람 취급하고, 그게 아니면 개, 돼지, 자동차, 옷만큼도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글 쓰고 있는 나도 벌레가 되어 있을까? 무슨 충일까? 틀니가 없어도 틀딱충이겠지. 어쨌든 틈만 나면 딱딱거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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