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삼성전자 백혈병 소송’ 박상훈 변호사, “타협으로 모두가 승자”

입력 2016-09-22 10:25 수정 2016-09-2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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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걸린 소송, 조정 통해 1000억 보상 이끌어

(사진=고이란 기자 photoe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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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스코어 3대2. 하지만 승자나 패자는 없었다.

지난달 30일 대법원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故) 황민웅 씨의 유족과 투병 중인 김은경, 송창호 씨가 낸 소송에서 "병과 업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소송을 낸 지 7년 만에 내려진 대법원의 결론이었다. 이들과 다른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이숙영 씨의 유족들은 항소심에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은 뒤 상고하지 않아 사실상 승소 판결이 확정됐다.

하지만 소송 결과와 관계없이 삼성전자는 이미 피해자들을 위해 1000억 원의 기금을 조성하기로 한 상태였다. 150여 명이 보상을 신청했고, 실제로 100명 이상이 보상금을 받았다.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명의의 사과도 있었다. 소송에 앞서 피해자들과 사측이 조정위원회를 통해 최종 합의를 먼저 이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년 간 보수 한 푼 없이 피해자들을 대리했던 박상훈(55·사법연수원 16기) 변호사를 지난 8일 서울 삼성동 법무법인 화우 사무실에서 만났다.

"5명이 확정판결 받는 데 7년이 걸렸어요. 앞으로 50명, 100명 같은 절차를 밟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겠어요. 이런 문제를 단 6개월 만에 보상위원회에서 해결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변호사는 이번 사례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합의에 의한 조정이 좀 더 폭넓게 활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만일 합의가 없었다면 삼성전자는 배상 비용은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훨씬 긴 기간 동안 부정적인 이슈에 갇혀 있어야 했겠죠. 삼성은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중국과 미국에도 반도체 공장이 있는데, 출구비용으로 1000억 원은 비싼 게 아닙니다.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고 봐요." 극단적 의견 대립이 있는 사안일수록 합의를 유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2009년,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활동하던 권두섭(46·29기) 변호사가 그를 찾아왔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근로자들의 산업재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데, 수십 년 간 노동법 연구를 해 온 박 변호사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부탁이었다.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원을 떠난 지 2년 만이었다.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가 국내에서 가장 큰 고객인 삼성을 상대하는 사건을 맡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군말없이 피해자들을 대리하기로 했다. 그의 전공이 노동법 중에서도 산업재해 분야인 면도 있었지만, '변호사로 활동하는 시간의 10% 이상은 공익활동을 해보자'는 각오가 있었다.

하지만 과정은 평탄하지 않았다. 사건을 맡아 6개월의 준비 끝에 2010년 첫 소송을 냈고, 1심 판결 선고까지 2년이 걸렸다. 2심과 3심이 남아 있었고, 100여명이 넘는 피해자들이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끝이 보이질 않았다. 결국 조정이나 화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1심 판결이 난 뒤에 노사 양측을 설득하는 작업을 계속 했어요. 삼성전자 쪽에도 이 문제를 풀고 가야 한다고 계속 전달을 했죠. 보상을 했다고 해서 삼성전자가 공해기업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작업 환경에서 유해물질인 벤젠이 검출됐는데, 오히려 전혀 보상을 하지 않고 피해가 없는 것처럼 부인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있었어요."

어려운 과정을 거쳐 협상테이블을 만들었지만, 대화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때까지 근로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반올림'은 산재보상과 재직자들의 처우 문제를 연계하길 바랐다. 삼성전자를 대표해 협상에 나온 법무팀도 화해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수임료 한 푼 없이 사건을 맡았던 박 변호사였지만, 화해 시도에 대한 편견 때문에 협상 과정에서 그를 배제하려는 분위기도 생겼다. 이 구도로는 진척이 없었다.

"2년 정도의 시간이 그냥 흘러갔어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조정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기존 판을 엎고 새로운 대화 틀을 짜는 논의가 시작됐다. 대리인끼리의 협상이 아닌 당사자가 직접 대면해 논의를 하고 제3자가 중재를 하자는 것이었다. 위원장으로는 노동법 분야 대가인 대법관 출신 김지형(63·11기) 변호사가 섭외됐다. 당초 가족대책위원회와 삼성전자 양자구도였지만, 김 변호사의 제안으로 반올림도 참여해 3자 참여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사진=고이란 기자 photoeran@)
(사진=고이란 기자 photoeran@)

박 변호사는 김 변호사와 삼성전자 이인용(59) 사장이 없었다면 극적인 타결은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를 이끌어 나가려면 카리스마가 필요해요. 김 전 대법관은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할까요. 반올림도 처음에는 조정 안받겠다고 했지만, 설득해서 들어오게 했어요. 삼성전자 쪽도 계속 불러서 설득하고요. 법원에서 오래 일하신 분이어서 의견을 경청하고 조율하는 능력이 있는 분이었죠." 박 변호사가 피해자 쪽을 대변하고, 김 변호사가 중재인 역할을 했다면 삼성 측 참여를 이끌어낸 것은 MBC뉴스데스크 앵커 출신의 이 사장이었다. "이 사장이 협상을 맡고 나서 실마리가 생겼어요. 중간에 '판을 깨자'는 식의 의견도 많았고, 의견이 분열되는 과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장이 삼성 내부에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해줬어요. 복잡한 상황에서도 신뢰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죠." 이 사장은 삼성전자 대표이사 명의로 작성된 사과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일단 진정성을 담보로 대화가 진행되자 상황은 빠르게 변했다. 위원회는 2015년 보상과 사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 3가지를 골자로 한 조정안을 마련했다. 세부적인 안을 마련하는 작업이 난제였지만, 삼성전자가 가장 큰 문제였던 1000억 원의 보상금 출연안을 받아들이면서 논의는 급진전됐다. "소송을 낼 수 있는 피해자 120명 중에서 승소 확정판결을 받을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됐을까요. 아마 40%이하였을 겁니다. 하지만 조정으로 전원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삼성전자도 통 큰 결단으로 기업리스크를 벗었던 셈입니다. 이건희 회장도 '해결해야 할 5대 중점 과제'에 이 문제를 넣었어요. 이 과정은 1000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박 변호사는 대법원 선고를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보상안을 타결하는 데 주력했다.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 보상금을 '증여'하는 형식을 빌어야 문제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만약 삼성전자가 승소한 뒤 배상금을 지급할 경우 형사법상 배임이 문제될 소지가 있었다. 소송 결과에 따라 피해자들이 돈을 못받게 될 부담이 있었던 셈이다. 결국 근로복지공단이 산업재해를 인정하느냐와 관계없이 피해자들은 보상 기준에 따라 돈을 받게 됐다. 재발 방지를 위한 '옴부즈만 위원회'도 설립됐다.

박 변호사는 우리 사회에 타협의 문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이번 사안을 대법원 판결 결과보다 백혈병 문제가 어떻게 흘러왔고,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큰 관점에서 봤으면 합니다. 패소가 확정된 피해자들도 7년 간 고생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했어요. 작년 말에 보상 문제가 타결된 덕분입니다. 최근에도 우리 사회에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는 난제들이 있잖습니까. 조정이 더 유용하게, 많이 활용돼야 합니다. 양 극단에는 설 곳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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