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교육도 직장생활도, ‘여성의 굴레’ 벗어나기엔…

입력 2015-11-2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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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 여성이 겪은 격동의 현대사- 참여와 배제사이에서 대안 찾기] ⑤ 딸로 엄마로, 진계희씨의 70년

▲1951년 부산 다방의 내부 모습.   (‘부산, 1950's', 임응식 사진집)
▲1951년 부산 다방의 내부 모습. (‘부산, 1950's', 임응식 사진집)
◇가족= 아버지(진기찬씨)는 경남 통영군 산양면에서 산양국민학교(현 초등학교)와 통신교육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고등 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좋아서 속곳바람으로 집에서 해저터널을 지나 통영군청까지 달려가 춤을 췄다. 아버지는 거제도에 부임해 경찰로 근무했는데 위생계 주임으로서 다친 사람들을 돌봐줬다.

당시에 아버지가 어머니의 집에 하숙하게 됐고 수원전문학교 잠사과 학생이었던 어머니는 기숙사에 있으면서 방학 때면 집에 내려왔다. 어머니를 보고 마음을 빼앗긴 아버지가 외할아버지에게 ‘편지나 돈 보낼 일이 없습니까?’라고 물어서 그 편에 연애편지를 썼다고 한다.

아버지가 합천에 근무할 때 나를 낳았고 다시 사천으로 부임했다. 해방 후에는 경찰서장이 됐다. 지금도 사천의 평화공원에는 아버지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어머니는 진주의 일신고녀를 졸업한 후 더 이상 진학시키지 않겠다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3일간 단식해 서울대 전신인 수원전문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기숙사에는 여학생이 팔도에서 각각 1명 정도밖에 없어서 ‘함경도 최’, ‘강원도 김’ 이런 식으로 불러 어머니는 ‘경상도 김’으로 통했다.

◇한국전쟁의 기억=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니까 집에서는 밤새도록 쌀을 볶아 미숫가루를 만들어 피란 준비를 했다. 경찰서장 가족인데도 아버지는 가족을 스리쿼터 자동차에 태우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버스에 태워서 합천에서 진주까지 갔다. 버스 안에서 오줌을 싸고 미숫가루 한 주먹에 물 한 모금씩 마시며 왔다.

6.25 때 인민군이 밤마다 횃불을 들고 내려오니까 경찰서 뒷마당의 지하 방공호에 숨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다. 이불 속에 있으니 땀띠도 나고 무서워 밤마다 울어 지금도 내 목소리가 굵다. 아버지가 인민군을 잡아 가두었다가 낮에는 햇볕을 쪼이도록 해주니 고맙다고 새끼줄로 그네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타라고 했다. 인민군은 웃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따뜻한 것 같았다. 온 가족이 다시 부산으로 피란 와서 아버지와 헤어진 것이 아버지를 본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38세였다.

◇전쟁 미망인들의 생활= 어머니는 32세로 딸 넷과 유복녀를 데리고 생활했다. 부산 서대신동에 집이 있었는데 혼자 남겨진 스무 살 내외의 어린 순경 부인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함께 살았다. 살아 갈 길이 막막했는데 ‘빠찡코’를 하면 돈이 많이 들어온다고 해서 남편들이 살아 돌아올 때까지 남포동에 큰 가건물을 지어서 시작했다. 어머니는 ‘광복회’의 경상도 지회장이 되어 미망인들을 돌봤다. 이 단체는 ‘전몰군경미망인회’로 명칭이 바뀌고 허가를 받아 사업을 계속했다. 어느 날 상이군인들이 몰려와 ‘우리도 먹고살자’고 해서 그만두게 됐다.

이후 미군부대 옆에 ‘카바레’를 차리고 미군을 대상으로 전쟁 미망인들이 춤을 추며 살아갔다. 그러다 보니 미망인들이 피임을 못 해서 아이들을 낳게 되고 검둥이가 태어나기도 했다. 시집에서도 안 받아 주고, 임신한 아이를 떼려고 약을 먹다가 죽기도 하고, 스스로 음독자살도 하고, 혼혈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고생한 이들이 많았다. 어머니는 불쌍한 여자들만 버려놓았다는 죄책감으로 그만뒀다. 신여성이자 인텔리로서 어머니는 남포동에 ‘늘봄’이라는 다방을 운영하면서 경찰 유가족들을 챙겼다. 클래식 음반도 많아 가수나 유명 인사들이 부산에 오면 들르곤 했다. 어머니는 딸만 다섯을 낳아서 하늘을 떳떳하게 보지 못하셨다. 당시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과 같았다. 사위들에게도 미안해했다. 그래서 나도 딸이 싫었다. 나는 첫 아들을 낳은 후에 두 번째로 딸을 낳고서 많이 울었다.

◇학창시절= 아버지가 경찰서장이라 당시 귀족학교인 사범부속국민학교를 다녔다. 꿈이 많던 시절 대학은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받아 서울농대 임학과에 가고 싶었고, 김찬삼 선생을 따라 지리학과에 가서 세계여행도 하고 싶었다. 축산학과에 가서 덴마크로 유학도 가고 싶었는데 결국 당시에 등록금이 제일 싼 신문학과에 들어갔다. 대학교 신입생 때 미팅을 했는데 티켓을 사서 번호뽑기로 짝을 지었다. 여럿이 모여서 포터블 트랜지스터를 틀어놓고 트위스트를 추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넓은 운동장에서 체육대회를 하는 낭만이 있었는데 지금은 건물이 많이 들어서서 대학이 마치 기업체 같다.

◇직장생활=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는데 기획은 모두 남자들이 로비를 받아서 결정하고 여기자는 지시만 받았다. 문학부 기자로 일하고 싶었지만 여기자는 미용, 패션, 요리, 육아 등 생활부만 맡아야 했다. 각자의 전공이나 능력을 살려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알음알음으로 상황에 따라 원칙 없이 일을 맡겼다. 한 달에 한 번 잡지책이 나오면 쫑파티로 방석집에 갔다. 남자 기자들이 ‘여자는 사람 아니냐’며 술을 권하고, ‘술 못 하면 담배라도 피우라’라며 못 견디겠으면 나가라는 식이었다. 결혼해서도 직장에 나오면 ‘남편 월급이 적나? 남편 월급으로는 밥 못 먹나?’ 하였고, 임신을 하면 ‘배가 남산만 해도 다니고 싶나?’라고 했다. 당시에는 월급 받으면 봉투째 엄마에게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는 반은 내가 쓰고 반은 엄마에게 드렸다. 월말이 가까워지면 남자 기자들이 돈 빌려 달라는 쪽지를 자주 보내서 직장을 그만두고 27세에 결혼을 했다.

당시의 결혼은 지금처럼 여러 가지 조건을 따지지 않았다. 미팅해서 결혼하고, 기차에서 만나 결혼하고, 친구의 소개로 만나 결혼하는 순박한 멋과 낭만이 있는 시절이었다.

▲한강맨션아파트 전경(1970)(국가기록원)
▲한강맨션아파트 전경(1970)(국가기록원)
◇결혼생활과 부동산 재테크= 꽃꽂이 선생님이 직업 군인인 자신의 남동생을 소개했는데 첫인상이 아버지를 닮은 옥골선비 같아 결혼을 했다. 어머니도 사윗감으로 군인이나 경찰을 싫어하셨는데 막상 보시고 나서는 허락하셨다. 나혜석의 영향을 받아서 ‘살다가 싫으면 그만두지’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군인 월급이 적어서 보너스가 나오면 그것으로 밀가루, 설탕, 식용유 등을 샀다. 이후 친구 셋이서 같이 돈을 모아 아파트를 샀다. 이것을 팔아서 차액을 남기고, 또 셋이서 함께 투자해서 차액을 남기는 방법으로 부동산 재테크를 했다.

◇자녀교육= 아들이 유학을 가고 싶어 해서 미국에 유학 신청을 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허가가 났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3년 후 군대에 가야 한다고 허가를 안 해 줘서 못 가게 됐다. 그러자 딸이 가겠다고 해서 딸을 데리고 미국에 가 5년 동안 뒷바라지를 했다. 처음에 인터뷰하러 갔을 때 영사가 “무슨 돈으로 공부할 거냐?”고 질문하니까 딸이 “엄마가 산이랑 아파트 두 채 있는데 팔아서 공부시켜준다고 했어요”라고 했다. 그 의지와 투지를 보고 허가를 내준 것 같다. 딸에게 미리 영세를 받게 하여 미국 가톨릭계 학교에 입학시켰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서툴러서 딸이 적응하기 어려웠는데 그럴 때마다 같이 공부해서 졸업을 시켰다. 아들은 군인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군인들에게 청탁하는 게 싫어서 의무경찰에 들어갔고 제대 후 보름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가족들은 내가 집안에서 아내, 어머니 역할만 하기를 바랐다. 맛있게 도시락 싸주는 ‘밥순이’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식구들 잘 먹이고, 안 아프게 돌보고, 깨끗한 옷 입히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종교= 지금도 아침마다 새 물을 그릇에 떠놓고 조왕신에게 기도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믿고 있고, ‘빌어 주면 통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샤머니즘은 어머니의 정성이라고 생각한다.

진계희씨(1945년 경남 합천 출생)를 통해서 주목되는 부분은 딸을 기피하는 어머니로부터 대물림받은 젠더 의식이 딸에게 내면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학창시절 많은 꿈이 있었는데도 등록금이 싼 학과를 선택했고 식구들이 원하는‘밥순이’로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투자를 하여 재테크를 계속하는 자매애를 보여주었으며, 이를 호의호식하거나 사치하는 데 쓰지 않고 자녀 교육비로 썼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아버지, 어머니, 자신, 딸, 아들로 이어지는 향학에 대한 열망이 강하였고, 이를 위해 난관을 뚫어가며 목표를 실현시키는 불굴의 의지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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