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땀이 식고 난 자리에 남는 것

입력 2026-04-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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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상담실을 찾은 한 20대 여성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그녀는 취업준비생으로, 매일 무기력과 우울에 빠져 지냈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누워서 영상만 보다 보니 하루가 가요.” 그러던 어느 날, 요양원에 계시던 외할머니가 위급해지셨다. 병원으로 긴급 이송된 할머니를 위해 엄마, 언니와 셋이 교대로 병원을 지켰다. 딱딱한 보호자용 의자에서 잠을 청하고, 새벽에 의료진을 붙잡고 상태를 물었으며, 미음을 숟가락으로 떠드렸다. 지독히도 고된 나날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녀의 얼굴이 달라졌다. 생기가 돌았다. 할머니가 고비를 넘기고 요양원으로 돌아가시던 날, 엄마, 언니와 찜질방에 앉아 식혜를 마셨다고 했다. 아무 말 없이도 충분했다고. 그 순간의 뿌듯함과 따뜻함은 오래 전 취업 준비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고 했다.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일하면서 ‘행복’에 관한 질문을 끊임없이 마주한다. 그리고 임상 경험이 쌓일수록, 행복에는 대체로 두 가지 결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첫 번째는 편안함과 안락함에서 오는 행복이다. 쉬고, 즐기고, 자극을 받는 것. 쇼츠 영상을 넘기며 웃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시간.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뇌의 보상 회로는 이 자극에 정직하게 반응한다. 문제는 유통기한이다. 이 행복은 빠르게 소비되고, 금방 허기가 찾아온다.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자극이 없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상태, 즉 금단과 닮은 괴로움이 뒤따른다. 요즘 많은 이들이 이 첫 번째 행복만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쉬고 싶고, 편하고 싶다고. 그 마음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사람이 채워지지 않는다.

두 번째는 고된 노동 후에 찾아오는 보람이다. 힘들고, 피곤하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기까지 한 과정이지만, 가치 있는 결과를 낳을 때 오는 행복이다. 병간호처럼 희생과 책임이 따르는 노동은 뇌의 보상 회로를 다르게 활성화한다. 단순한 쾌락이 아닌, 자아존중감(self-esteem)과 의미감(meaning)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Eudaimonia(에우다이모니아)’라고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다운 행복’에 가깝다. 이 행복은 일시적 도파민이 아닌,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의 안정적 분비를 통해 오래 지속된다. 심지어 평생의 자산이 되기도 한다.

많은 환자들이 “행복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불편함을 피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불편을 감내한 뒤에야 비로소 찾아온다. 편안만 추구하면 삶은 점점 얕아지고, 결국 더 큰 불행을 맞이한다. 반대로, 가치 있는 고난을 견디고 나면 마음에 단단한 근육이 생긴다.

그녀는 지금도 취업 준비 중이다. 그러나 눈빛이 다르다.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안다. 행복은 기다려서 오지 않는다. 땀이 식고 난 자리에, 조용히 고여든다. 최영훈 일산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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