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 연휴 극장가를 오랜만에 북적이게 한 작품이 나왔습니다. 장항준 감독의 장편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설 연휴 닷새 동안 267만 명 이상을 동원, 개봉 15일 만에 400만 관객을 돌파했는데요. 누적 관객수는 417만 명을 넘어섰고 매출 점유율은 60%를 웃돌았죠. 예매율도 50%대를 유지하며 경쟁작과 격차를 벌리고 있습니다. 올해 개봉작 중 최다 관객 기록이죠.
흥행의 중심에는 출연진들의 ‘연기 차력쇼’가 있는데요. 단종 역 박지훈, 엄흥도 역 박해진의 마음이 아려오는 관계성을 비롯해 한명회(유지태 분)와 매화(전미도 분), 엄태산(김민 분), 금성대군(이준혁 분) 등 주·조연 가릴 것 없는 빽빽한 연기력이 호평받고 있습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비극적 죽음을 맞는 단종과 함께 서슬 퍼런 분위기 속 의리를 지킨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특히 실존 인물이지만 많은 이에겐 익숙지 않았던 그 이름. 엄흥도를 전면에 내세웠는데요. 영화는 영월의 촌장 엄흥도를 단종 최후의 가장 가까운 인물로 그렸죠. 그렇다면 기록 속 엄흥도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요?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됐습니다. 1457년, 복위 움직임이 일어난 직후 사사됐죠. 이후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고 전해졌는데요.
엄흥도는 당시 영월의 호장(戶長)이었죠. 호장은 고려·조선시대 향리직(鄕吏職)의 우두머리로, 지방 행정 실무를 총괄했습니다. 영화 속 촌장 엄흥도와는 조금 다른데요. 여러 문헌은 그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고 전합니다. 장례용품을 마련하고, 아들들과 함께 시신을 거두어 선산에 안장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죠.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에는 그 과정과 이후 조정의 처리, 관련자 처벌, 정치적 정황이 기록돼 있는데요. 엄흥도의 이름 역시 단종 유배 시기의 상세한 교류 장면 속에 등장하진 않죠. 실록에서 그의 존재가 또렷해지는 시점은 오히려 후대에서 보여집니다.
1748년 간행된 영월엄씨 족보에는 엄흥도의 행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단종과의 만남이 서사적으로 정리돼 있는데요. 여기서 곡소리를 듣고 찾아갔다는 이야기와 단종과의 교감 장면이 비교적 상세히 전해집니다. 문중에서 작성한 ‘충의공 엄흥도 행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죠. 행장은 사망 이후 인물의 삶과 덕행을 정리하는 문서인데요. 이곳에서도 아내의 만류와 강을 건넌 일화가 반복적으로 등장하죠.
실록은 단종 사사 이후 정치적 긴장을 기록하면서 복위 세력에 대한 처벌과 엄격한 통제 조치를 설명했는데요. 전승에 따르면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를 삼족 멸문하겠다고 명했죠. 이 표현 자체는 실록의 직설 문장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당시 상황이 극도로 민감했다는 점은 유추해볼 수 있는데요.
그렇기에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뤘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죠. 주변의 우려에 “위선피화 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 선한 일을 하다 화를 입어도 달게 받겠다고 말했던 행장 속 이야기는 모두를 울렸죠. 단종의 시신을 몰래 영월 엄씨 선산에 안장한 엄흥도는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설화도 있는데요. 전승에 따르면 단종의 시신을 묻으려 했지만 눈보라가 몰아쳐 맨땅을 찾을 수 없었고 그때 산속에 앉아 있던 노루 한 마리가 놀라 달아난 자리가 눈이 녹아 드러나 있었죠. 엄흥도 일행은 그곳을 하늘이 내린 자리라 여겨 시신을 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설화는 후대에 숙종 대 단종이 복권될 때 묘를 이장하려다 “이미 명당”이라며 그대로 두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지죠.


엄흥도의 충절은 조선 후기 들어 국가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요. 단종 사사 이후 200년의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죠.
17세기 후반, 단종 복권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단종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는데요. 1669년(현종 10)에는 송시열의 건의로 엄흥도 후손이 등용되죠. 이는 단순한 인사 문제가 아니라, 단종 충신에 대한 국가적 복권 작업의 일환인 셈인데요. 단종을 ‘노산군’이 아닌 왕으로 인정하는 흐름 속에서 그를 위해 위험을 감수한 인물 역시 공식 질서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숙종 대에는 영월 창절사에 배향되는데요. 창절사는 사육신과 단종 관련 충신을 모신 공간으로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국가가 충절을 공인하는 절차였죠.
결정적인 장면은 18세기 초에 나옵니다. 1733년, 병조는 엄흥도 후손에게 군역과 잡역을 면제하라는 완문을 내리는데요. 이 문서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기탁돼 있죠. 가로 205㎝, 세로 37.4㎝에 달하는 장문의 고문서로, 후손의 역 부담을 줄여 충의를 기리라는 취지가 담겼습니다. 영조 대에는 엄흥도를 종2품 가선대부 공조참판으로 추증하는데요. 왕이 직접 제문을 내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죠. 이 시기 조정은 단종 충신의 위계를 정리했는데, 엄흥도는 단종을 위해 직접 목숨을 끊은 인물 바로 다음 급으로 평가받았습니다.
19세기 후반, 고종은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하사하는데요. 이 시호는 엄흥도의 이름 앞에 오늘날까지 붙는 공식 칭호가 됐죠. 단종 사사 이후 은거했다는 지방 호장이, 수백 년 뒤 국가가 부여한 시호로 기억되는 인물이 된 거죠.

엄흥도는 새로 발견된 인물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은 실록의 추증 기사로, 완문으로 보존되고 족보와 행장에서 수백 년간 전해져 왔는데요. 다만 그 기록은 주로 문헌 속에 머물러 있었죠.
영화는 그 균형을 바꿨는데요. ‘시신을 수습했다’는 한 줄 기록을 인물의 선택과 관계의 시간으로 확장했죠. 실록의 압축된 사건이 스크린 위에서 감정과 대사, 갈등을 가진 인물로 재구성됐는데요. 물론 픽션이 더해졌지만, 출발점은 분명 기록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