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권의 성적표는 대개 숫자로 매겨진다. 정부가 드라이브를 거는 생산적 금융 역시 관행적으로 공급액 규모가 주요 척도로 여겨진다.
하지만 최근 금융사의 추진 계획과 실적을 공유하는 ‘생산적 금융협의체’에서 정작 주목을 받은 것은 우리금융이 제작한 ‘생산적 금융 가이드북’이었다.
가이드북에는 생산적금융 용어 정의부터 여신 취급 가이드라인, 산업별 케이스 스터디까지 세부적으로 담겼다. 전사적으로 생산적금융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영업점 직원이 창구에서 느끼는 막막함을 시스템으로 해결하고자 한 시도다.
협의체 이후 금융위원회가 사측에 가이드북 원본 공유를 요청했다는 사실은 생산적 금융의 안착을 위해 숫자보다 ‘판단 기준’ 정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이러니는 성적표에서 발생한다. 우리금융의 생산적 금융 공급액 규모는 5대 금융지주 중 가장 낮다. 하지만 실행의 순서는 달랐다. 우리금융은 5대 지주 중 가장 먼저 80조 원 규모의 공급 계획을 발표하며 선제적으로 움직였다. 첫 계획 발표 이후 타 금융사 실무진들이 우리금융을 찾아와 수립 배경 등을 물으며 자문을 구했던 것도 이들이 보여준 실행력 때문이다.
공급액 규모로는 하위권인 우리금융이 계획 수립과 실무 대응에서는 업권의 ‘일타강사’ 역할을 한 셈이다. 이번 가이드북 역시 거대한 숫자만 던져놓는 경쟁에서 벗어나, 현장이 움직일 수 있는 구체적인 설계도를 먼저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궤를 같이한다.
생산적 금융의 성패는 액수의 크기에만 있지 않다. 자금이 실제 벤처 산업 현장으로 어떻게 흐르게 하느냐가 본질이다. 제대로 된 기준 없이 액수만 늘리는 것은 생산적 금융이 아니라 정책의 이름을 빌린 ‘포트폴리오 리스크’에 불과하다. 현장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매뉴얼은 치열한 실행의 고민 없이는 불가능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투입하는 액수보다 현장에서 작동하는 ‘기준’이다. 기준이 없으면 실무는 숫자 뒤로 숨고 정책은 공허한 구호로 남는다. 숫자는 한순간의 기록이지만 정교한 시스템은 금융의 체질을 바꾼다. 우리금융이 만든 가이드북이 업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실행의 디테일이 없는 숫자는 그저 기록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