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 심화에 기업간 협력 활발
산업계 생존전략으로 자리매김
전문가 “코피티션 선택 아닌 필수”

‘적과의 동침’을 넘어 ‘협력없는 경쟁은 없다’는 인식이 산업계를 지배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벌어진 글로벌 공급망 불안, 미·중 무역 분쟁, 트럼프 관세 정책, 공급망 재편, 탄핵정국 등 각종 대내외 리스크가 ‘적’으로 여겨졌던 경쟁 기업들과 손을 잡게 만들었다. ‘코피티션(coopetition, 협력과 경쟁의 합성어)’이 기업의 생존을 위한 경영전략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22일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트럼프 2.0 정책 시행 후 우호적인 환경에 놓인 국내 산업은 조선 업종 단 한 곳에 그쳤다. 정유, 기계·방산, 석유화학 업종은 ‘중립적’으로 나타났고 주력 수출품목인 자동차, 반도체, 철강, 이차전지는 비우호적인 것으로 분석됐다. 대부분 미국 수출 비중이 높거나 미국 정책 노출도가 높은 업종들이다.
이들 업종은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실리를 위한 코피티션 전략을 택했다. 대표적으로 전일 이뤄진 현대자동차그룹과 포스코그룹의 철강, 이차전지 분야 ‘원팀’ 구성이다. 한 때 라이벌 관계였던 두 그룹은 미국 관세 정책에 정면돌파하기 위해 동맹전선을 구축했다. 포스코는 58억 달러(약 8조5000억 원)가 투자되는 현대제철의 미국 루이지애나 전기로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에 지분을 투자하면서 북미 철강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투자 자금 확보와 함께 포스코와의 협업으로 이차전지 핵심 소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다변화된 공급망을 구축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산업계를 둘러싼 심각한 도전에 따른 위기의식 심화가 두 그룹 협력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실제 국내 대기업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전략적 동반자 관계’ 구축에 열중하고 있다. 단순히 동종 업계 간을 넘어 이종 산업 간 협력으로도 확장되는 추세다. 미래차 산업에서는 자동차 업체들이 테크기업과 손잡고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배터리 기술을 공동 개발 중이다. 기술 개발을 위해 국내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경쟁사와의 ‘동맹’도 마다하지 않는다. 현대차는 미국의 자율주행 기술 스타트업과 협업 중이며, LG에너지솔루션과도 배터리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은 배터리, 스마트 팩토리에 이어 미래형 비즈니스 고객 솔루션까지 기술 협력의 범위를 넓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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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최근 CJ그룹과도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삼성전자의 로봇 자회사 레인보우로보틱스와 CJ그룹의 물류계열사 CJ대한통운은 인공지능(AI) 기반 휴머노이드 물류 로봇 공동 개발에 나서기로 한 것. 과거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과 고(故)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은 유산 상속 문제를 두고 법정 공방을 벌이며 갈등을 겪었지만, 실리를 따지는 3세 경영 체제 아래 관계 정상화를 모색했다는 평가다.
코피티션의 대표적 성과사례로는 K-방산이 꼽힌다. 대표적인 라이벌 기업인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협력을 통해 해외 방산시장 개척과 대형 수출 성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코피티션 전략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한다. 박병진 한양대학교 경영과 교수는 “한국기업은 경쟁기업과 가치사슬의 일부 영역에서는 협력하면서 다른 영역에서는 경쟁하는 코피티션 관계를 형성하기 쉬운 구조”라며 “최근 코피티션은 융복합이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4차 산업혁명에서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