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작명(作名)의 재미와 의미

입력 2017-12-1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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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문을 읽다 보니 재미난 기사가 눈에 띄었다. 자궁(子宮) 대신 포궁(胞宮)이라 쓰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자궁은 아들을 품고 낳는 것만 인정하는 것처럼 인식되니 세포의 포를 써서 신체 기관이란 중립적 의미를 지닌 포궁으로 부르자는 이야기였다.

이 기사를 읽자니 1990년대 초반의 해프닝이 떠오른다.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이슈가 되어 건설 예정지 주민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사회심리학자들이 가세하여 주민들의 반대 이유를 추적해본 결과, 원자력 발전소는 핵폐기물을 배출한다는 불안과 공포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핵폐기물의 공포가 문제의 주범임을 간파한 연구자들은 해외의 경험을 벤치마킹하기로 결정했다. 곧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핵폐기물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력 부산물이 배출되는데, 이들 부산물은 매우 오랜 기간 안전한 관리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면서 주민들 설득에 나섰다. 동일한 실체가 핵폐기물로부터 원자력 부산물로 변형되면서 주민들의 공포감을 해소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결과, 큰 저항 없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성사시킨 실례가 있었다.

작명(作名), 곧 이름 짓기에 담긴 의미를 실감케 하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전의 결손 가족이나 편모 가족은 요즘은 한부모 가족이나 모자 가족이라 불린다. 불완전하거나 부족하다는 의미의 결손이나 기울거나 치우친다는 의미의 편(偏)에는, 이미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는 가족을 향한 부정적 선입견과 근거 없는 편견이 담겨 있음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처음 한부모란 이름이 등장했을 때는 잠시 어색하긴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결손 가족이라는 표현이 귀에 거슬린다.

한때는 별생각 없이 윤락녀(淪落女)란 표현을 사용했던 적도 있었다. 윤락 여성이라 함은 윤리가 타락한 여성이란 의미일 텐데, 매매춘 여성이란 표현이 등장한 이후 이전의 부적절했던 호칭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선 아직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결혼할 예정이란 의미를 담은 미혼(未婚) 여성 대신, 현재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자연스럽게 지칭하는 비혼(非婚) 여성 개념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작명의 또 다른 재미는, 단어의 원래 의미를 확장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영어의 virgin(버진)이란 처녀를 뜻하는 대신 오르가슴 경험이 없는 여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재정의되고 있고, bitch(비치)란 매춘 여성을 의미하는 대신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여성 모두를 포괄하기도 한다. 장애를 육체적으로 결함이 있는(physically defected) 상태라는 의미 대신 육체적으로 도전받는(physically challenged) 상황으로 새롭게 정의하자는 주장 속엔,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 생각의 틀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음이 분명하다. 어떤 개념이든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 민감함을 키워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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