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생태계, SW 중심 체제로 전환
韓 제조역량 받쳐줄 혁신 서둘러야

지금 유럽 방산업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름 가운데 하나는 독일 뮌헨의 방산 인공지능(AI) 기업 헬싱(Helsing)이다. 2021년 창업한 이 회사는 지난해 6억 유로 규모의 시리즈D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약 120억 유로, 우리 돈으로 18조원 수준의 방산 데카콘(decacorn)으로 올라섰다. 전통 방산 대기업이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영역에 신생 AI 기업이 불과 몇 년 만에 진입한 것이다. 헬싱의 부상은 한 스타트업의 성공담을 넘어, 전쟁이 방산 산업의 성장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음을 보여준다.
헬싱의 성장 비결은 단순히 “AI를 잘한다”는 데 있지 않다. 핵심은 전장의 문제를 소프트웨어로 빠르게 풀어낸다는 점이다. 헬싱의 AI 에이전트는 사브 그리펜 E 전투기 시험비행에서 성능을 입증했고, 유로파이터 전자전 체계에도 AI 기반 소프트웨어 통합이 추진되고 있다. HX-2 정밀 타격 드론 역시 우크라이나 공급용으로 대량 생산되고 있다. 방산의 중심이 ‘완성품 납품’에서 ‘전장 데이터를 학습하며 계속 진화하는 체계’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방위산업의 판이 바뀌고 있다. 과거 방산기업은 오랜 기간 정부 사업을 수행하며 천천히 성장했다. 전차, 함정, 전투기, 미사일처럼 개발 기간이 길고 진입장벽이 높은 무기체계가 산업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장의 속도가 달라졌다. 이제 전장은 더 빨리 보고, 더 빨리 판단하고, 더 싸게 많이 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변화의 한복판에서 유럽의 방산 스타트업들이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방위산업은 늘 위협의 모양에 따라 바뀌었다.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충격은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 창설의 배경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아이언돔은 레바논과 가자지구의 단거리 로켓 위협에 대한 응답이었다. 지금 유럽도 같은 변곡점에 서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에 “전쟁은 먼 곳의 일이 아니다”라는 현실을 각인시켰다.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밀리터리 밸런스(Military Balance) 2026’ 에 따르면, 2025년 유럽 국방비는 거의 5630억달러에 이르렀다. 위협 인식이 재정의 문을 열고, 열린 재정이 산업의 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 돈은 기존 대기업에만 흘러가지 않는다. 드론, AI, 자율체계, 전자전, 데이터 융합 분야의 스타트업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독일의 퀀텀시스템즈는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정찰 드론의 효용을 입증하며 유럽 방산 스타트업의 상징이 되었고, 슈타크는 자폭 드론과 임무통제 소프트웨어를 앞세워 단기간에 주목받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전통 대기업을 대체하는 데 있지 않다. 대기업이 전차, 함정, 전투기 같은 복합 하드웨어를 맡고, 스타트업은 AI, 드론, 소프트웨어, 센서융합 같은 빠른 기술 영역을 맡는 새로운 분업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도 이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올해 2월 중소벤처기업부와 방위사업청은 2030년까지 방산 참여 스타트업 100개사와 방산 벤처천억기업 30개사를 키우겠다는 방산 스타트업 육성방안을 발표했다. 방산 스타트업 챌린지, 공모형 획득제도, 넥스트유니콘 프로젝트 펀드 등도 함께 제시됐다. 이는 한국 방산 생태계를 대기업 중심의 수출 산업에서 기술 기반의 확장형 산업으로 바꾸겠다는 신호다.
문제는 제도 발표 그 자체가 아니다. 관건은 속도다. 한국은 이미 K2 전차, K9 자주포, 천무, FA-50, 잠수함, 함정, 유도무기 등에서 세계 시장의 신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다음 경쟁은 완성품 수출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앞으로는 무기체계 위에 올라가는 AI, 자율운용, 전자전, 임무 소프트웨어, 유지·보수·정비(MRO) 데이터, 무인체계 운용 알고리즘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하드웨어는 강한데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약하면 다음 단계의 방산 패키지 경쟁에서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
한국형 방산 유니콘이 나오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스타트업 기술이 군 시범사업에서 끝나지 않고 빠르게 초도 양산과 운용으로 이어져야 한다. 둘째, 연구개발 이후 양산 전까지의 자금 공백을 메워줄 성장자금이 작동해야 한다. 셋째, 군의 시험·훈련·운용 데이터가 보안 원칙 안에서 기업의 기술 개선으로 다시 흘러가는 피드백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방산 AI와 무인체계는 책상 위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실제 운용 데이터를 먹고 자란다.
헬싱의 사례는 한 회사의 성공담이 아니다. 위협이 산업을 깨우고, 전장이 기술을 검증하며, 자본이 속도를 붙일 때 방산 생태계가 얼마나 빠르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한국도 조건은 갖추고 있다. 명확한 안보 위협이 있고, 세계 시장에서 검증된 방산 하드웨어가 있으며, 정보통신기술(ICT), AI, 제조 역량도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 세 가지를 하나의 속도 체계로 묶는 일이다.
방산 유니콘은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위협을 기술로 번역하고, 기술을 군 운용으로 연결하며, 운용 데이터를 다시 산업의 성장 자산으로 바꾸는 나라에서 탄생한다. 다음 4년, 한국 방산의 과제는 더 많은 무기를 파는 것을 넘어선다. 이제는 세계가 따라올 수밖에 없는 방산 혁신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