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사 착수 전 휴대전화 대화나 파일을 삭제하는 행위가 형사 책임이나 구속 사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정치 브로커’ 명태균 씨가 휴대전화와 이동식 저장장치(USB)를 숨기도록 지시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으면서, 수사 전 증거 삭제·은닉 행위의 위험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7일 법조계에 따르면 창원지법 형사4부(김인택 부장판사)는 5일 이른바 ‘황금폰’을 포함한 휴대전화 3대와 USB 1개를 처남에게 은닉하도록 지시한 혐의(증거은닉교사)로 기소된 명 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정치자금법 위반 등 본안 혐의는 무죄로 판단됐지만, 재판부는 본안의 유무죄와 무관하게 증거 은닉·인멸 지시는 독립된 범죄로 처벌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증거를 은닉하려는 고의가 인정된다”며 유죄로 봤다. 다만 “기소 이후 스스로 증거를 임의 제출한 점 등을 참작했다”며 양형 이유를 밝혔다.
실무에서는 수사 개시 이전에 휴대전화 메시지를 삭제하거나 사진·영상·파일을 정리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당사자들은 이를 단순한 ‘정리’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법적으로는 사건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숨기거나 없앤 행위로 평가될 소지가 크다. 증거인멸·은닉죄는 실체적 진실 발견을 방해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으로, 서류뿐 아니라 휴대전화와 메신저 대화, 사진·영상, 클라우드 백업, 계좌 내역 등도 모두 증거에 포함될 수 있다.
흔한 오해는 “아직 수사가 시작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장차 형사사건으로 비화할 수 있음을 인식한 상태에서 증거를 삭제·은닉했다면, 수사 착수 여부와 관계없이 고의적인 회피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고소·고발이나 감사가 예정된 상황에서의 삭제 행위는 범죄 성립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사 전이었다”는 해명이 오히려 ‘알고도 삭제했다’는 정황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인식도 위험하다. 법은 직접 증거를 숨긴 경우뿐 아니라, 타인에게 은닉을 지시한 경우 역시 처벌 대상으로 본다. “잠깐만 맡아달라”는 요청 역시 수사 과정에서 증거 은닉 지시로 해석될 소지가 크다.
형법 문언상 증거인멸·은닉죄는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대상으로 해, 자기 사건의 증거를 스스로 없앤 행위는 곧바로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다만 이를 근거로 “내 자료는 지워도 된다”고 안심하는 것은 위험하다. 형사처벌을 피하더라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보다 직접적인 불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증거인멸 행위는 구속영장 발부 여부의 핵심 사유가 된다. 실무상 법원은 ‘증거 인멸의 염려’를 주요 구속 사유로 판단하는데, 휴대전화 초기화나 자료 삭제 이력 자체가 추가적인 증거 훼손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정황으로 해석될 수 있다. 향후에도 증거를 없앨 우려가 있다는 판단이 더해지면서 구속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수사 강도와 재판 단계의 양형에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증거 훼손 정황이 포착되면 수사기관은 강제수사 범위를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 재판 과정에서도 증거 훼손 시도는 반성 없는 태도나 사법 절차 경시로 평가돼 선처 가능성을 좁히는 요인이 된다.
허윤 변호사는 “수사 전 섣부른 증거 정리는 방어권 행사가 아니라, 스스로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넣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도움]
허윤 변호사는 법무법인 동인 수사대응팀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검사, 방위사업청 옴부즈만, 서울특별시의회 입법법률고문, 언론중재위원회 자문변호사, 기획재정부사무처 고문변호사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