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운상가 일대는 문화재 앞이라는 이유로 수십 년간 개발이 막혀있었습니다. 개발을 막을 것이 아니라 문화재에 걸맞은 랜드마크 동네로 재탄생이 필요합니다.” (30년째 귀금속 가게 운영 중인 A씨)
“다른 공원도 아니고 종묘 앞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건 문화 정서상에도 별로 좋지 않고 경관을 해칠까 봐 우려됩니다.” (매일 종로에서 산책하는 시민 B씨)
서울시가 서울 종로구 종묘 맞은편 재개발 사업지인 세운4구역에 최고 높이 141.9m로 상향 계획을 세우며 찬반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낙후된 도심에 새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주장과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의 경관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맞서고 있다.
11일 오전 종로구 종묘 일대는 휴관일임에도 불구하고 산책하는 시민들과 경관을 관람하기 위한 외국인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종묘를 찾은 시민들은 종묘 앞 세운4구역과 세운상가 재개발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인근 주민 C씨는 “(종묘 일대는) 서울에서도 유일하게 시간의 결이 남아 있는 곳”이라며 “그런 곳 앞에 40층 가까운 건물이 서면 햇빛이 막히고 바람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이어 “도심이 낡았다고 해서 모두 새로 세울 필요는 없다”며 “서울의 역사는 콘크리트보다 오래 간다”고 덧붙였다.
매일 반려동물과 함께 종묘에서 산책을 즐긴다는 D씨도 “종묘 인근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위화감이 들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반면 세운상가 일대의 오랜 침체를 해소하려면 고층 개발이 불가피하다고 반박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종묘 인근에서 부동산중개사무소를 7년째 운영 중인 E씨는 “문화유산도 중요하지만 경관을 일부 가린다고 해서 막을 일은 아니다”라며 “신구가 어우러져 사람사는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건 재생해서 될 일이 아니고 수십 년간 눌려있던 걸 압축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며 “타산이 나오려면 30층 이상은 돼야 지주, 상인, 건설사들도 산다”고 강조했다.

세운4구역 토지주들도 재개발 추진에 힘을 싣고 있다. 세운4구역 토지주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세운4구역이 재개발되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해지될 것이라는 주장은 맹목적 억측이며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재개발로 오히려 대규모 녹지가 종묘와 남산을 연결해 오히려 종묘가 더 빛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국가유산청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바깥에서의 개발 규제를 완화한 서울시 조례 개정이 유효하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자마자 오히려 법을 만들어서라도 높이를 규제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면서 “직권남용에 해당할 뿐 아니라 사유재산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법률을 만들겠다는 것은 위헌 행위”라고 비판했다.
서울시는 지난달 30일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결정(변경) 및 지형도면’을 고시했다. 여기에는 건물 최고 높이가 기존 71.9m에서 141.9m로 두 배 가까이 상향되는 내용이 담겼다. 앞서 국가유산청은 2018년 심의를 통해 이 일대에 71.9m 높이 기준을 정한 바 있다.
서울시 고시 이후 국가유산청은 즉각 반발했다. 국가유산청은 종묘 전면에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 종묘 정전에서의 시야와 경관이 훼손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근거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가유산청은 “깊은 유감의 뜻을 밝힌다”며 “서울시가 일방적으로 최고 높이를 대폭 상향해 종묘의 가치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반대 의견이 나오고 있다. 7일에는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0일엔 김민석 국무총리가 차례로 종묘를 방문해 서울시의 ‘일방 행정’을 비판했다. 최 장관은 “해괴망측한 일”이라며 “권한을 조금 가졌다고 해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겠다는 서울시의 발상과 입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김 국무총리는 현장을 둘러본 뒤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턱’ 하고 숨이 막히는 경관이 될 것”이라며 “종묘 인근 개발은 단순한 도시계획이 아니라 국민적 토론을 거쳐야 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시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60년이 다 되도록 판잣집 지붕으로 뒤덮여 폐허처럼 방치된 세운상가 일대는 말 그대로 처참한 상황이다. 2023년에 세운상가 건물의 낡은 외벽이 무너져 지역 상인이 크게 다친 일도 있다”며 “세계인이 찾는 종묘 앞에 더는 방치할 수 없는 도시의 흉물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라고 했다.
이어 “거듭 말씀드리지만, 서울시의 세운4구역 재정비촉진사업은 종묘를 훼손할 일이 결단코 없다. 오히려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의 생태‧문화적 가치를 높여 더 많은 분이 종묘를 찾게 하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6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시의회를 상대로 낸 ‘서울특별시 문화재 보호 조례’ 일부개정안 의결 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문화유산법상 보존지역 바깥에 대해서까지 국가유산청과 협의해 조례를 정해야 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며 서울시와 서울의회의 손을 들어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