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세·노란봉투법·상법개정안…투자 판단 기준 흔들
“무역보다 더한 불확실성은 정책”…계획보다 생존 먼저

“계획을 세우기는커녕 무슨 변수가 또 터질지를 먼저 가늠하는 게 일이 됐습니다. 지금은 손대봤자 소용이 없어요.”
한 대기업 임원의 토로다. 환율이나 원자재 가격 같은 통상적인 변수보다 더 무서운 건, 미국 트럼프 정부의 거센 통상 압박과 한국 정부의 잇단 규제 입법이 기업의 예측 가능성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어떤 시나리오도 제대로 설정하기 어렵다는 게 현장의 공통된 반응이다.
29일 재계에 따르면 기업들은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압박, 대내적으로는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라는 ‘사면초가’를 체감 중이다. 상호관세에 따른 수출 타격을 피하기 위해 대미 투자 확대를 검토해야 하지만 국내에서는 법인세 인상 방침과 노동·지배구조 규제 입법이 병행되며 투자 판단의 명확한 기준점이 사라졌다는 지적이다.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조법 개정안은 노동조합의 불법 파업으로 인한 손해에 대해 사용자가 근로자 개인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못하게 한다. 파업 대응 리스크는 커지고, 경영의 자율성은 줄어든다. 여기에 더해 상법 개정안은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을 포함해 경영권 안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여기에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은 기업들의 예측 가능성을 더욱 흐리고 있다. 다음 달 1일 발효를 앞둔 상호관세에다 반도체 등 전략 품목을 겨냥한 추가 관세 부과까지 거론되며 수출기업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통상 리스크와 규제 리스크가 동시에 닥친 건 처음”이라며 “예전에는 변수는 있었어도 시나리오별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떤 시나리오도 예측이 안 된다”고 말했다.
삼성·SK·LG 등 주요 그룹 역시 신성장 로드맵과 사업계획서를 유동적으로 조정 중이다. 한 그룹 관계자는 “지주사를 중심으로 내부 리스크 점검이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자본시장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경제는 관세 부과와 불확실성 확대라는 이중 충격에 의해 1% 수준의 GDP 하락 압력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수출 주도형 산업구조를 가진 한국은 정책 방향성이 예측 불가능할 경우, 투자와 생산 결정을 사실상 보류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강현주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관세 부담이 현실화되지 않더라도 불확실성의 확대는 단순히 이론적인 우려가 아니라 관세 부과와 유사한 수준의 실물경제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는 미국의 무역정책 불확실성이 국내 기업의 투자 결정을 지연시키는 한편 소비 심리를 위축시켜 실질 경제 활동을 제약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기업들의 어려움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2025년 하반기 기업경영환경에 대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주요 경영 리스크 요인으로 기업들은 △내수 부진 및 경기 침체 지속 △글로벌 수요 둔화 및 수출 부진 △글로벌 통상환경 불확실성 △국내 정책 및 규제 리스크 등을 꼽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해 실시한 ‘기업규제 전망조사’에선 불확실한 규제 리스크가 가장 큰 투자 제약 요소로 지목됐다. 응답 기업의 38.4%가 ‘임금 관련 규제’(통상임금, 최저임금 등)를, 26.7%가 ‘정책 방향 변화’로 인한 예측 불가성을 주요 애로로 꼽았다.
김재현 경총 규제개혁팀장은 “글로벌 무역규제 강화와 대내 정치 불안으로 우리 기업들은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규제개혁은 국가의 예산 투입 없이도 기업 투자와 고용 창출을 유도해 경제 활력을 회복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경제계의 집단 반발도 터져 나왔다. 한경협, 대한상의, 경총, 무역협회 등 8개 경제단체는 이날 공동 입장문을 내고 “중차대한 통상 국면에서 국회가 연이어 규제 입법을 통과시키는 것은 자승자박”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이들은 “관세 협상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규제를 연이어 쏟아내는 것은 기업들에게 극도의 혼란을 초래한다”며 “우리 경제는 올해 0.8%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기업들이 외부의 거센 파고를 넘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규제를 거두고 국익 관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