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선 칼럼]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과 법의 의미

입력 2023-12-16 10:00 수정 2023-12-2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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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선 강남대 정경대학 교수(법학‧철학 박사)

2024년 IVR 서울 개최 성공을 기원하면서

▲ 유주선 강남대 정경대학 교수(법학‧철학 박사)
▲ 유주선 강남대 정경대학 교수(법학‧철학 박사)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는 1951년 ‘전체주의의 기원’, 1958년 ‘인간의 조건’ 등을 출간하며 그녀의 정치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 과정에서 남겨진 1950년대 유고들을 중심으로 주로 서양 정치철학의 전통과의 씨름, 정치의 특징에 대한 발견과 그것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는 7편의 글들로 이뤄진 책이 바로 ‘정치의 약속’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서양 정치사상의 전통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 전통에서 비롯된 전체주의 가능성을 지적하며, 플라톤 철학이 마르크스에게까지 이어지는 ‘전통’에 대해 자신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 보편적 가치 또는 보편성 문제는 플라톤 이래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사항에 해당한다.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철학은 정신적 힘인 이성에 의존하게 되는데, 플라톤은 이러한 이성의 힘을 강조했던 대표적인 고대 철학자이다.

아렌트 정치철학의 출발은 플라톤의 이성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정신적 힘이 이성에 의존하면서 이성을 강조한 플라톤의 ‘철인왕’을 아렌트는 강도 높게 비판한다. 플라톤은 국가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국가(Politeia)’에서 철학자는 지혜로운 자이며 이데아의 세계를 아는 진리 인식자로 본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능력에 대한 한계와 철학자의 오류 가능성을 배제한 플라톤의 전제는 아렌트 비판의 표적이 된다. 더 나아가 아렌트는 진리를 아는 진정한 철학자가 국가를 이끈다고 할지라도 심각한 문제를 발생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철학자의 심리상태로서 ‘철인왕 콤플렉스’에서 우리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원리를 발견하는 자세’와 ‘이 원리를 통해 지배적 위치를 점하려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인왕 콤플렉스’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다.

첫째 자신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원리를 제시한다는 착각과 함께 그러한 원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비난하면서, 자신만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자기기만(自己欺瞞) 가능성이다.

둘째 현실의 정치적 다원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철저히 개인적인 이성적 사유에 의존해 보편성을 추구하는 탓에, 정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철인왕 콤플렉스’에 빠지면 철인왕 자신도 불행을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점도 있지만, 최악의 경우 그의 말을 믿고 따른 사람들 역시 위험에 빠질 수 있음에 더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정관적 삶(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 삶(vita activa)’으로 구별한다. ‘정관적 삶’은 ‘신적 진리’ 또는 ‘영원한 것’(the eternal)에 대한 수동적 정관 혹은 관조를 의미하며, 고요함(quietness)과 수동성(passivity)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 ‘활동적 삶’은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동 혹은 세계와 세계적인 것(the worldly)과 관련된 사고 및 활동으로 이뤄져 있다. 아렌트는 세 가지 유형인 노동(labour), 작업(work), 행위(action) 등을 통해 ‘활동적인 삶’을 설명한다.

이 가운데 특히 그녀는 ‘행위’에 대해 주목하는데 ‘행위’는 개인적 계기뿐만 아니라 반드시 공동체적 계기, 곧 세계성(worldliness)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행위’는 고립된 개인에게서는 발생할 수 없고, 본질적으로 ‘공적’인 현상으로 정치성을 함축한 인간 활동에 해당하게 된다.

정치 활동은 인간의 복수성을 인정하고 한 공동체에 속한 다양한 개인들이 서로의 생각을 표현하고 소통하면서, 스스로 공동체의 원리를 발견하고 꾸려 나가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공적 감각, 즉 정치 영역이 필요하고 또 개인이 여기에 참여해서 자신을 표출할 자유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개인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는 존재이며, 누구도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을 듣지 않고도 모두 알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볼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아렌트의 정치 판단은 칸트의 미감적 ‘판단력 비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정치적 판단은 형식 논리적 명증성이나 일관성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간실존의 복수성이나 다양성에 기초해 의견을 형성하고 교환하면서 동의 가능성에 이르는 과정에 해당한다.

아렌트는 이러한 정치적 판단의 가능 조건으로 비판적으로 거리두기와 공통감각의 작용을 든다. 고립된 자아의 사적, 주관적인 독백이 아닌 복수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의견을 표현하고 또 교환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적 판단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지닌 이성이나 의지의 작용과는 다른 공통감각의 작용으로 일반적 동의 가능성과 타당성에 이르게 된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아렌트는 법의 의미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고를 전개한다. 인간의 행위영역인 정치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외부(外部)로부터 정치 세계를 규정하는 초월적 법 혹은 법칙들에 대해 아렌트는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즉 정치 세계의 원리를 인간 행위에 내재하는 원리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것이 아렌트 생각이다.

정치 세계 밖에 있는 초월적 근거에서 구할 경우 인간의 다원성과 자유가 실현되는 정치의 영역은 그 독자성을 상실해버리거나 다른 형태로 탈바꿈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정치공동체를 규제하는 법이 다양한 정체성과 시각을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상호 행위를 통해 합의나 구상되지 않은 채 정치 세계의 원리가 외부의 초월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작동할 경우, 인간의 다원성이 실현되는 자유로운 정치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위협하는 반(反)정치적 동력이 될 수 있다고 그녀는 판단했다.

정치가 실종됐다는 대중의 탄식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내년 7월 7~12일 동안 ‘법치주의,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미래’라는 대주제로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법철학 및 사회철학회(IVR) 학술대회가 우리나라 최초로 서울에서 개최된다. 경축과 함께 20세기 위대한 정치철학자 아렌트를 추모하며 대회 성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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