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26. 금 펜촉이 좋다지만

입력 2018-10-04 18:53 수정 2018-10-0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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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연구소장

1910년대 만년필 사업을 시작한 파이로트, 플래티넘, 세일러는 경쟁이 심했다. 한 회사가 신제품을 내놓아 성공하면 두 회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바로 따라 했다.

예를 들면 뚜껑이 길고 몸통이 짧은 일명 ‘빅 캡’은 세일러가 미니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출시했는데, 사용하지 않을 때는 짧아 와이셔츠 상의에 쏙 들어가고 뚜껑을 꽂으면 길어져 휴대와 사용이 편리했다. 이것이 성공하자 파이로트와 플래티넘도 같은 콘셉트로 엘리트와 포켓을 출시했는데 너무나도 비슷해 전문가들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런 경쟁은 1962년 시작된 금 함량 경쟁을 보면 좀 더 실감할 수 있다. 1962년 플래티넘사는 금 함량 75%인 18K 금 펜촉이 장착된 만년필을 내놓았다. 18K 금 펜촉은 유럽과 미국에서 오래전부터 생산된 것이어서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일본은 18K 금 펜촉이 처음이었다. 일본은 전쟁으로 1938년부터 1953년까지 약 15년간 정부가 금 펜촉의 생산을 제한하거나 금지했다. 그래서 18K 금 펜촉은 한동안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소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 플래티넘의 18K는 14K 만년필보다 고급스럽게 느껴졌고, 탄력이 우수해 필기감 또한 최고라고 광고한 것이 시장에서도 통했던 것이다. ‘금 함량 경쟁’은 1969년 이 성공에 자극받은 세일러가 21K를 내놓으면서 점입가경(漸入佳境)에 들어간다. 바로 다음 해 1970년 플래티넘과 파이로트는 92% 금 함량인 22K를 출시해 불을 붙인다. 이에 질세라 세일러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23K를 출시한다.

받고 치받는 도박판처럼 플래티넘 역시 23K를 내놓지만, 결국 1996년 세일러가 24K 금 펜촉을 만들면서 이 경쟁은 끝이 난다. 금 함량 경쟁은 의미 있었던 경쟁일까. 이것은 품질과 상관없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딱 맞는다.

▲황금과 백금으로 된 각종 펜촉.
▲황금과 백금으로 된 각종 펜촉.
만년필의 펜촉을 금으로 만드는 이유는 잉크로 인해 녹슬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고, 다른 금속과 적당히 섞어 탄력이 생기게 하는 것이 그다음인데, 금 함량 58.5%인 14K만 되어도 이것은 충족된다. 보통 금 함량이 높아지면 탄력이 더 좋아 필기감이 더 좋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금은 함량이 높아질수록 잘 휘어지지 탄력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사실 필기감은 확대경으로 보면 펜촉 끝에 붙어 있는 은백색 금속이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은백색 금속은 보통 이리도스민이라고 부르는 백금계의 합금인데 단단하고 치밀하여 만년필 펜촉의 끝 재질로는 최적이다.

황금과 백금, 이 기막힌 궁합은 1830년 중반 완성됐다. 그 이전엔 부식 때문에 금 또는 은, 그리고 거북 등껍질로 펜촉을 만들고 루비나 다이아몬드를 그 끝에 붙여 사용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내구성이 낮아 1820년대 백금의 일종인 로듐(rhodium)을 붙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 방법을 토대로 로듐보다 훨씬 더 내구가 좋은 이리도스민을 붙이는 방법이 1830년대 중반 개발되었고 오늘날의 금 펜촉 역시 거의 변함없는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 펜촉의 수명은 만년필이란 이름처럼 천년, 만년 동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수명이 있다. 회사와 모델과 사용자에 따라 다르지만 오래가는 것은 600만 자 정도 사용할 수 있다. 600만 자는 하루에 1000자씩 매일 쓰면 16년 이상 쓸 수 있는 분량이다.

더 오래 사용하게 할 수 없을까? 달나라도 가는 세상에 못할 게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펜 끝이 닳아야 사용자에게 길이 나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이겠지만 만년필의 세계 역시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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