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인문경영] ‘안희정 무죄’라는 이중 잣대

입력 2018-09-0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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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貞操)와 성적(性的) 자기 결정권은 동의어인가? 안희정 전 충남 지사의 성폭행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든 생각이다. 재판부는 피해자 김지은 씨에 대한 비공개 심문 중 ‘정조’를 언급했다가 적절치 않다며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변경하겠다며 발언을 철회했었다고 한다.

‘정조’의 사전적 정의는 여자의 곧은 절개, 순결을 지키는 일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해 상대방을 선택하고 성관계를 가질 권리를 의미한다. 정조가 순결을 지킬 의무라면 성적 자기결정권은 자유롭게 대상을 선택할 권리다. 정조가 여성에게만 쓰인다면 성적 자기결정권은 양성 모두에게 적용된다. 정조가 기울어진 운동장의 불평등한 윤리라면 성적 자기결정권은 평평한 운동장의 평등한 논리다.

안 전 지사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그 판단 근거로 피해자 김 씨가 간음 후에도 우호적 태도를 보인 점 등을 들었다. 해당 판결문을 읽으며 위력의 위(威) 자가 떠올랐다. 사나울 위(威)는 여자 여(女)와 무기 술(戌)이 합쳐진 글자다. 약한 여자가 무기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다.

시대에 따라 무기의 성격도 변한다. 전통사회의 물리적 폭력은 오히려 단순하다. 문고리에 숟가락 꽂고, 은장도 품는 것만으로도 거부가 가능했다. 현대판 위력은 금력과 권력, 영향력의 종합세트다. 당장의 숨줄은 물론 밥줄, 명줄까지 좌우한다. 완력은 무서워 벌벌 떨게 하지만, 위력은 눈짓 한 번만으로 알아서 지레 기게 만든다. 자칫 피해자다움을 드러냈다간 조직을 해치는 반역자 내지 상사를 망치는 꽃뱀으로 몰려 본전도 못 찾기 십상이다. 나와 조직 모두를 살리는 생존책은 최대한 내색 않고 태연한 척하는 것이 미투운동 이전까지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에겐 프로의 징표였다.

알고 보면 ‘정조’와 ‘위력’은 동전의 양면이다. 위력을 가진 이들일수록 정조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들은 ‘정조의 위력’을 강조하며 민중과 여성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런 이들일수록 뒤에선 위력을 이용해 성적 방종을 마음대로 저지르는 이중성을 보였다.

역사학자들은 “노예사회 및 봉건사회 탄생 시기에 희박했던 정절관념이 예교(禮敎)로 포장되며 여성의 족쇄가 된 것은 사유제, 가부장제 사회와 일부일처제가 정착되면서부터”라고 주장한다.

남편 입장에서 사유재산을 혈통이 확실한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처첩이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갖는 것을 불허하며 이를 정절 강조로 포장한 것이다. 부정(不貞)한 여자는 있지만 부정한 남자라는 표현이 없는 진짜 이유다.

“굶어 죽는 것은 사소한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큰일이다.” 송대의 유학자 주자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본인은 내로남불의 가짜 군자 혐의로 불명예 퇴진을 했다. 감찰어사 심계조가 상소문을 올려 “(주자가) 비구니 둘을 유혹해 첩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외직으로 나갈 때마다 동행했다”고 언행 불일치를 폭로한 것이다.당시 반대파의 정치음모설이 있었으나 사실은 사실이었다.

정조에 대한 지배층의 이중의식은 서양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 부인의 3분의 1을 애인으로 삼았다고 할 정도로 바람둥이였다. 정작 부인 폼페이아에 대해선 유혹의 대상이 됐다는 혐의만으로 이혼을 전격 결행했다. “카이사르의 아내 되는 여자는 의심조차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말이다.

남성 중심 가치관의 이중성은 오늘날도 여전히 맹위를 떨친다. 한편에선 위력으로 정조를 유린하면서 또 정조의 위력으로 피해자를 비난한다. 안 전 지사의 성폭행 무죄 판결은 물론 관련기사 댓글에 피해자의 정조관을 탓하는 내용이 차고 넘치는 것도 그 연장선이다. 이런 이중성이 판치는 한, ‘정조’를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용어를 바꾸더라도 말만 그럴듯할 뿐 오십보백보다. 아니 위선의 양두구육(羊頭狗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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