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진영(陣營)의 눈으로 ‘미투’를 보지 말라

입력 2018-02-2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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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 온라인뉴스부장

3월 대학 개강을 앞두고 대학교수들이 떨고 있다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가 들린다.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때문이란다. 자고 나면 누군가의 추악한 과거와 가식적인 행태가 새로 드러나는 요즘이다. 유명인뿐 아니라 학교나 일터에서 공공연하게 몹쓸 짓을 한 이들이 내 차례는 아닌가 두려워할 법하다.

서지현 검사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미투는 그야말로 ‘분위기를 타고’ 번져나가는 양상이다. 검찰 내 성추행 폭로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지켜볼 새도 없이 고은 시인, 연출가 이윤택과 윤호진, 배우 조민기, 사진작가 배병우 등 며칠 새 성추행 폭로가 잇따르고 있다. 문화 예술계를 비롯해 종교계와 연예계, 학계까지 그간 묻어 두었던 썩은 냄새가 여기저기서 진동한다.

채 한 달도 안 돼 10명 안팎의 유명인 성추행 가해자들이 줄줄이 드러나며 우리 사회 전체가 당혹스러워하는 느낌이다. 존경받거나 인기를 끌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X같은 놈’으로 전락하는 모양이라니 기가 찬다. 더구나 가해자로 드러난 일부 인물들은 도덕성과 정의를 추앙하며 목소리를 높였던 인사들이다. 연출가 이윤택이나 오태석, 고은 시인, 배우 조재현 등은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이다. 정의와 도덕을 주장하는 블랙리스트 인물들로 한때는 다른 의미에서 피해자로 언급되던 이들이다.

그들의 위선적인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정치권과 일부 언론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성추행 가해자들을 싸잡아 정치문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이제 막 한국에서 물꼬를 트기 시작한 미투 운동에 대해 분명히 강조돼야 할 단어들은 사회적인 윤리나 도덕, 피해자들의 인권이다. 그런데 이런 단어들 대신 ‘좌파’니 ‘진보’니 하는 단어들이 끼어들면 정치 쟁점이나 이념의 문제가 될 우려가 있다. 사회적인 책임과 제도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목소리 대신 정치화된 프레임이 돼 버리면 곤란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여야 정치권은 각각 ‘좌파광풍’ 대 ‘적폐청산’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우며 대립 중이다. 이런 정치적인 프레임 안에 미투 운동을 끌어들이면 정작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고 만다. ‘좌파 문화권력의 추한 민낯’이라든가 ‘좌파의 적폐’라는 단어로 가해자들을 정의하는 것은 미투 운동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다.

엊그제 논란이 된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발언을 보자. 그는 “미투 운동에 대해 예언을 하겠다”며 “공작(工作)의 시각에서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기회로 삼기 위한 뉴스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투 운동을 지지하거나 범죄를 엄단해야 한다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이들이 문재인 정부와 청와대, 진보적 지지층을 타깃으로 한 ‘공작’을 펼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작 정치’라는 거칠고 근거 없는 단어가 오히려 미투 운동을 정치적인 논쟁으로 끌어들인 모양새다. 김 씨의 발언에 여야 정치인들이 나서서 말이 되느니, 안 되느니 논란이다.

용기 있는 여성들이 나서서 사회적인 분위기를 바꿔 놓고 있다. 성추행 피해는 감춰서 될 일이 아니며, 죄책감과 수치심은 피해자의 것이 아닌 가해자의 것이라는 인식의 흐름이다. 이 분위기를 타고 이제 해야 할 일은 ‘변화와 개혁’이다. 변화와 개혁은 우리의 딸들이 더는 이런 피해와 비극을 경험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권력과 위계를 내세운 성폭력 대책과 방지기구,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인 대책과 사회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진지한 논의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런 시점에 정치인은 물론 그 누구라도 그들만의 좁은 정치바닥의 언어로 미투 운동의 가치를 흐리게 하지 않는지 잘 감시해야 한다. ‘미투’는 사회를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대화와 타협, 시민들이 참여하는 넓은 정치의 판 위에 깔려야 하는 문제다. 정치판과 정치의 논리, 정치바닥의 언어가 ‘미투’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사회의 앞길을 막거나, 오도(誤導) 또는 호도(糊塗)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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