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의 독서산책] 레나 모제·스테판 르멜 ‘인간증발’

입력 2017-09-18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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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일본인 12만명이 사라진 까닭

세상사(世上事)는 모든 것이 바라보기 나름이다. 주변을 둘러보고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비교하다 보면 불편함이 축복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레나 모제와 사진작가 스테판 르멜의 공저 ‘인간증발’은 일본 사회의 그림자와 같은 부분을 깊숙이 조명했다. 땅이 넓지 않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장기 불황이나 자본주의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세계에서 일본만큼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해 버린 사람이 많은 나라도 드물다. 일단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그 사람을 찾는 일은 어렵다. 일본은 인구 약 1억2800만 명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서 증발된 사람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무모한 일에 가깝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일찍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상사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의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숨어 있다.” 아마도 인간증발도 이런 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수요가 있는 곳에는 시장도 있다는 사실이다. 야반도주(夜半逃走)를 도와주는 일도 번듯한 직업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에는 스스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내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야반도주를 돕는 사업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증언한다. “어두컴컴한 새벽에 수상한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검은색 담요와 커튼을 들고 나타난다. 재빨리 창문을 가리고 가구포장이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고객은 막상 닥치면 가전제품까지 모두 가져가고 싶다고 마음을 바꾼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인간증발의 가장 큰 요인은 경제적 어려움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 야반도주가 가장 극심했던 시점은 1990년대 중반으로, 한때 매년 12만 명까지 기록하기도 했다. 이들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과정은 엇비슷하다. 버블경제 시기에 서민들은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렸다. 샐러리맨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소액 고리대금업을 ‘사라리만 긴유’라고 하고 줄임말로 ‘사라킨’이라 부른다. 이자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야쿠자와 손을 잡았다. 야쿠자는 수금 역할을 맡게 되는데 때로는 야쿠자가 직접 운영하는 대부업체에서 빌린 돈을 ‘야마킨’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단 그렇게 빚의 덫에 빠지고 나면 헤어날 길이 없다.

대다수의 인간증발은 빚쟁이로부터의 탈출에서 비롯된다. 지금도 야반도주를 돕는 서비스는 비용이 일반 이사보다 3배나 비싼 40만 엔(400만 원) 정도를 요구한다. 9년 동안 야간 이삿짐센터를 운영하면서 사람들의 야반도주를 도왔던 하토리 쇼는 “다수의 사람들은 은신처에서 과거를 지우고 새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책에는 아내를 떠난 사람, 부모를 떠난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이름을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끝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는 것은 부채 때문이다. 주인공 가운데 노년에 들어선 사람들은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기 때문에 카메라 앞에 당당히 섰다. 이미 성장세가 크게 꺾인 우리나라는 앞으로 부채 문제 때문에 홍역을 치를 것으로 예상된다.

읽는 내내 ‘인간사의 과제 가운데 경제적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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