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배 칼럼] 일일신(日日新)

입력 2016-08-02 10:39 수정 2016-08-0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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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신(日日新)하다’라는 말은 ‘날로 더욱 새로워지다’라는 뜻이다. 이 어구는 대학(大學)에 나오는 ‘구일신(苟日新)이어든 일일신(日日新)하고 우일신(又日新)하라’는 한자 명언에서 유래됐다. ‘진실로 하루가 새로워지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는 뜻으로,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탕왕(湯王)이 세숫대야에 새겨 놓은 좌우명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을 때 지도교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도 비슷한 문구가 있다. 한 학기가 지난 후에 학기 시작과 비교해서 학기 말에 본인의 실력이 비슷하다면 실패한 학기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 난다.

개인의 삶에서 일일신이 중요하듯이,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혁신(innovation)이 매우 중요하다. 일개인이 스스로 매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무엇이 어느 정도 새로워졌는지 고민해도 그 차이를 정확히 알기가 힘든데, 하물며 한국 경제가 지난 수십 년간 어느 정도 혁신을 해왔는지 기술 진보(technological progress)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술 진보 및 혁신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 중의 하나는 미국 특허상표청(United States Patent and Trademark Office)의 특허 건수를 살펴보는 것이다. 유틸리티 특허(utility patent, 이하 특허)는 발명에 대한 특허(patent for invention)로, 미국 특허상표청은 특허의 첫 번째 발명자의 주소지로 구별해서 세계 각국의 특허 건수 통계를 발표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63년에서 2015년 사이에 600만 건 이상의 특허가 허가되었고, 이 중 45%가 미국 외부에 거주했던 발명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경우 1963년에서 1969년 사이에 9건에 불과했으나, 1980년대 이후 그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2015년 미국 특허상표청에서 허가받은 대한민국의 특허 건수는 1만7924건으로 미국의 14만969건, 일본의 5만2409건을 제외하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다. 독일은 1만6549건, 대만 1만1690건, 중국은 8116건으로 우리나라 다음으로 많은 특허를 허가받았다.

한국 경제 성장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비유되었던 것에 못지않게 한국에 있는 발명자들이 허가받은 미국 특허 건수의 양적 팽창은 놀랍다. 한국의 놀라운 특허 건수의 양적 팽창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특허상표청 전경. 특허상표청에 등록된 국가별 특허 건수와 피(被)인용 정보를 조사하면 각국의 기술 진보 정도를 알 수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특허상표청 전경. 특허상표청에 등록된 국가별 특허 건수와 피(被)인용 정보를 조사하면 각국의 기술 진보 정도를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가 서울대 경제학부 이지홍 교수, 예일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권순우 씨와 공동 연구한 결과가 있다. 세 명이 공동저자이며 제목은 ‘International Trends in Technical Progress: Evidence from Patent Citations, 1980-2011’(Economic Journal, forthcoming)이다. 이 연구에서는 미국 특허상표청의 약 400만 건의 특허 자료를 이용해 국가 간 기술 진보의 동향을 1980년부터 2011년까지 약 30년간 분석했다.

미국 특허상표청의 특허자료는 미국에 있는 발명자들의 특허뿐만 아니라 해외 각국의 발명자들이 미국에 출원한 특허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출원된 각각의 특허에 대한 인용 정보를 담고 있어, 국가 간 지식 확산(knowledge diffusion)이나 특허의 질(patent quality)을 비교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

미국 특허상표청에서 승인된 특허의 질을 측정하기 위해 이 연구에서는 특허별 피(被)인용 정보를 이용해 세계 각국 특허의 평균적인 질을 비교했다. 그 결과 주목할 만한 경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민국과 대만에 소재한 발명가들의 경우 1980년대에는 미국 소재 발명자들의 특허에 대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인용된 반면, 1990년대에는 이 차이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다시 말해, 1990년대에는 한국 발명가들의 특허 건수의 양적 팽창뿐만 아니라, 기술 진보의 질적 개선이 동반되었다는 것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비교해 보면 한국과 대만 모두 특별한 질적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중국에 소재한 발명가들의 경우에는 한국과 대만이 1990년대에 경험한 것과 유사한 따라잡기(catch-up)가 2000년대에 일어났다. 현재 2010년대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매우 궁금하지만, 아직 충분한 자료가 구축되지 않아 결론을 내지 못했다.

둘째, 기존의 특허 강국이었던 일본과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경우 미국 발명가들의 특허에 대비해 그 피인용도가 1990년대, 2000년대 양 기간에 걸쳐 줄어들었다. 특히, 일본 발명가들의 경우 1980년대에는 미국보다 피인용도가 높았던 반면, 2000년대에는 한국, 대만, 중국에 비해 특별히 피인용도가 높지 않았다. 다시 말해, 미국을 제외한 기존의 선진국들에 대비해 한국, 대만, 중국 특허의 질적 개선이 주목할 만하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 소재 발명가들의 특허 피인용도가 미국 외 발명가들의 특허에 대비해 전혀 줄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따라잡기에 성공했던 한국과 대만의 경우 2000년대에는 특별한 개선이 없었고, 기존 특허 강국이었던 일본과 유럽 선진국들은 미국보다 뒤처져 가고 있다. 중국의 경우 2000년대에 질적 개선을 이루었지만, 2007년까지 미국 특허상표청 특허 승인 건수가 연도별로 1000건도 되지 않았던 점을 근거로 짐작해 보면, 2010년대에 급격한 양적 팽창과 질적 개선이 동시에 진행될지는 미지수이다.

넷째, 특허의 피인용도를 조사한 것 외에 기술 진보의 동향을 살펴보기 위해 미국에 있는 발명가들의 특허를 미국 외의 발명가들이 얼마나 신속히 인용하느냐도 분석해 보았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 소재 발명가들의 특허 피인용도는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 소재 발명가들의 특허가 세계 지식의 한계(knowledge frontier)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특허를 미국 외의 국가들이 얼마나 신속하게 인용하는지의 수치 역시 기술 진보 정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특허 인용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일본과 유럽 선진국들은 1980~2011년 꾸준히 높은 속도로 미국 특허를 인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한국, 대만, 이스라엘의 경우 1980년대 초반에는 미국 특허 인용 속도가 일본과 유럽 선진국에 현저하게 뒤처져 있었지만, 2000년대 후반에는 그 격차가 없어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이 2000년 후반까지 선진국이나 한국, 대만 등에 비해 미국 특허 인용 속도가 눈에 띄게 뒤처져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 있는 발명가들이 2010년대에는 이를 따라잡을 수 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허가 한국 경제의 일부 산업에 집중돼 있고, 미국 특허상표청의 특허 인용 자료만으로 기술 진보 여부를 평가하는 것에 대해 학계에서 논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 진보나 혁신은 계량화하기 힘들고, 특허 자료만큼 기술 진보의 자취를 보여주는 자료도 드물다. 특허 관련 자료는 미국 특허상표청 자료뿐만 아니라 국내 특허청, 유럽 특허청(European Patent Office) 자료 등이 있다. 이런 특허 자료를 기존의 경제ㆍ사회 자료들과 결합하고, 더 나아가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미래 한국 경제의 동력을 찾아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탕왕의 세숫대야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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