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공안정국이 두렵다- 김경철 부국장 겸 정치경제부장

입력 2013-09-12 10:58 수정 2013-09-13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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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의 녹취록에 나타난 이른바 ‘RO(혁명조직)'의 거사도구는 허름하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비비탄 총 개조하며 무장하고, 총기를 깎아 만들고… 딱 소설속 돈키호테의 무장 수준”이라고 절하했다.

때마침 12주년을 맞은 9•11테러의 거사도구 역시 허름했다. 포장상자를 열 때 널리 쓰이는, 10cm 정도의 박스커터였다. 슈퍼마켓에서도 판매되는 생활용품이었기에 2001년 당시엔 탑승 시 자유롭게 휴대할 수 있었다. 이슬람 테러범들은 작은 칼을 앞세워 여객기를 장악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향해 돌진했다. 이 만행으로 미국 경제의 상징인 110층 마천루가 푹석 무너져 내렸고 3000여명의 생명이 스러졌다.

무장 수준이 저열하다고 해서 거사가 실현성이 없는 몽환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베이징대 교수와 사서 등 백면서생 13명이 1921년 상하이의 한 학교 기숙사에서 결성한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장담처럼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태우듯’ 20여년 만에 대륙을 석권했다.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된 1773년의 보스턴 차 사건도 인디언으로 위장한 150명이 맨손으로 벌인 일이었다.

RO의 기반은 그들보다 훨씬 좋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사실관계가 더 명확히 밝혀지겠지만 만약 국정원의 설명처럼 ‘R(혁명가)’ 130명이 기간시설 파괴에 나선다면 참사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렇다고 3대 세습체제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시대착오적인 종북주의자의 무장봉기가 일시적 혼란을 일으킬망정 결코 성공할 리 없다.

걱정은 오히려 딴 곳에 있다. 이석기 사태가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과 동전의 앞뒤처럼 찰싹 달라붙어 전방위적인 편가르기 게임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석기 사태 방점을 둔 보수진영과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에 포인트를 맞춘 진보진영의 공방전은 물러설 수 없는 열전으로 접어들었다. 특히 여야의 무분별한 주도권 다툼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RO가 기생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를 기화로 으스스한 매카시즘 선풍이 몰아치며 공안정국의 망령이 되살아날 수도 있다.

새누리당은 RO의 ‘수(수령)’ 로 지목된 이석기 의원의 의원직을 제명하고, 소속당인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추진 중이다. 헌정질서 파괴자에 대한 철퇴는 당연하지만, 아직 유죄가 확정되는 않은 상황에서 강행하려는 것은 민주주의 절차와 헌법에 반하는 무리수다.

공안정국을 조성해 내년 지방선거까지 끌고 가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날리던 공안검사 출신들이 정부의 중요 의사결정 라인에 대거 포진하고 있는 터라 더욱 그럴싸하게 들린다. 공교롭게도 김 실장은 1989년 당시 검찰총장으로 공안정국의 주역이었다. 노태우정부가 공안관계장관회의와 검찰 안기부(현 국정원) 경찰 보안사(현 기무사)를 망라한 공안합동수사본부까지 구성해 대대적인 공안사범 척결에 나서면서 노조탄압과 운동가에 대한 대량구속 및 의문사가 줄을 이었다.

장외투쟁 중인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선거개입 같은 국기문란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국정원 개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추진 중인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는 본업인 간첩 수사를 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른바 ‘셀프개혁’의 대항마로 자체 개혁안을 마련하는 것은 좋지만 일부 내용은 한참 오버됐다.

여기에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 자식을 뒀다는 보도를 계기로 권력기관 사이의 이상기류가 알려지면서 국기문란 사건 수사는 막장 드라마로 전락한 느낌이다. 보도의 진위는 별개로 치더라도 국정원 수사와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반환으로 기세를 타던 검찰의 발걸음이 무거워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국정원도 공개수사로 전격 전환한 뚜렷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서 내란음모 수사를 위기 돌파를 위한 국면전환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더욱 사고 있다. 이처럼 대표적 수사기관이 흔들려서인지 1980년의 합수부와 89년의 공안합수부처럼 합동이란 이름을 내세운 공룡 수사조직이 트라우마처럼 떠오른다.

박근혜 대통령이 11일 귀국했다. 자리를 비운 7박8일 동안 더욱 경색된 정국을 풀고 파행중인 국회도 정상화시킬 수 있는 능력자는 박 대통령 본인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치(外治)에서 그랬듯 내치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이며 공안정국에 대한 기우를 날려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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