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신 입찰 담합 혐의로 형사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과징금 취소 행정소송에서는 패소한 녹십자가 제기한 재판취소 사건이 헌재 심판대에 올랐다. 동일한 담합 행위의 ‘경쟁제한성’에 대한 판단이 엇갈린 가운데, 행정 판결에 대한 대법원의 심리불속행 상고기각이 재판청구권을 침해했는지를 두고 공방이 벌어졌다.
헌재는 23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헌재 대심판정에서 주식회사 녹십자가 대법원을 상대로 제기한 재판취소 사건의 첫 변론을 진행했다.
녹십자 측은 동일한 입찰 담합 행위의 ‘경쟁제한성’을 두고 형사재판과 행정소송에서 상반된 판단이 나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형사재판에서는 경쟁제한성이 인정되지 않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행정소송에서는 경쟁제한성이 인정됐다는 것이다.
녹십자는 상고이유서에 관련 형사 확정판결을 제시했음에도 대법원이 심리불속행으로 상고를 기각한 것은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심리불속행은 민사·가사·행정소송 등에서 중대한 법령 위반 등이 없는 상고 사건을 대법원이 추가 심리 없이 기각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녹십자 측 대리인 서형석 율촌 변호사는 “상고심특례법은 심리속행 사유를 지정하고 있는데, 이 사건은 이 사유에 해당함이 명백하다”며 “청구인은 상고이유서에서 서울고법의 행정소송 판결이 경쟁제한성에 관한 기존 대법원 판례에 반한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는 중대한 법령 위반에 관한 사항이 있는 경우를 심리속행 사유로 보는 상고심특례법 제4조 1항 5호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공정거래위원회 측은 해당 조항이 원심판결의 결과에 영향을 미쳐 판결이 파기될 가능성이 있는 법령 위반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녹십자 측이 주장하는 상고이유는 경쟁제한성의 ‘법리’에 관한 것이 아닌 ‘사실 인정’의 문제이므로 심리속행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정위 측 대리인 최수희 변호사는 형사재판에서도 입찰에 들러리로 참여한 업체들은 유죄가 확정된 반면, 낙찰받은 녹십자 등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며 개별 사건마다 상반된 결론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 최 변호사는 “공정위가 당사자로 참여할 수 없는 형사소송과 달리 행정소송에서는 직접 당사자로 참여해 적극적으로 경쟁제한성을 입증할 수 있다”며 “(관련) 다른 행정소송 6건에서도 경쟁제한성이 모두 인정됐다”고 강조했다.

이날 헌법재판관들은 이러한 판단 차이가 대법원의 심리속행 사유에 해당하는지, 심리불속행 기각이 헌법상 재판청구권을 침해했는지 등을 물었다.
정정미 헌법재판관은 양측에 이번 사건의 핵심 쟁점인 ‘경쟁제한성’이 사실인정의 문제인지, 법률적 판단의 문제인지를 물었다.
공정위 측은 “경쟁제한성에 관한 법리는 확립돼 있다”며 “이 사건에서 주로 문제 된 것은 제3자가 공급확약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는지, 수의계약 이후 가격이 달라질 수 있었는지 등 사실에 대한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녹십자 측은 “사실오인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법령의 해석과 적용은 법적 판단의 영역”이라며 “채증법칙 위반도 중대한 법령 위반에 포함되는 만큼 사실오인이라고 해도 심리속행 사유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이후에는 재판소원 전문가인 김진한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변호사의 참고인 의견 진술과 추가 질의가 이어진다. 이후 양측이 각각 5분간 최종 변론을 진행하며 이날 변론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번 사건은 재판소원 제도가 시행된 이후 전원재판부 회부 결정이 내려진 ‘1호 사건’이다.
앞서 녹십자는 질병관리청이 2017년 4월부터 2019년 1월 사이 발주한 HPV4가 백신 구매 입찰 3건에서 백신 도매상들을 들러리로 섭외해 입찰에 참여한 뒤 1순위로 낙찰받아 입찰 담합을 했다는 이유로, 공정위로부터 시정명령 및 과징금 납부명령을 받았다.
이에 녹십자는 공정위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소를 제기했지만, 서울고법은 지난해 10월 녹십자 측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대법원 역시 2월 상고를 기각했다. 이에 녹십자는 3월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녹십자 측의 재판청구권, 재산권 등이 침해됐다며 이 사건 판결 취소를 구하는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