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O 올인 생태계의 한계…M&A 막힌 한국 벤처, 돈맥경화 터진다

입력 2026-09-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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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생성한 이미지.
▲AI로 생성한 이미지.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창업주들

두산 창업주 매헌 박승직은 1896년 서울 종로4가 배오개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상점을 열었다. 갑오개혁으로 육의전이 폐지돼 누구나 상업을 할 수 있게 되자 가게 문을 열어 이 일대의 거상이 됐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주는 라디오 한 대를 분해·조립하며 국내 전자산업의 초석을 쌓았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조선소 없이 배를 수주하는 상식 파괴를 보였다. SK 최종건 창업주가 1953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공장에서 “구부러진 것은 펴고 끊어진 것은 잇는다”며 부품을 주웠던 일화는 SK그룹 70년 역사의 시작이 됐다. 자원 하나 없는 불모지에서 결단과 뚝심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개척이 1세대들의 창업 정신이다. 자본 부족은 모험적인 차입으로, 기술 부족은 모방으로 돌파했다.

창업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명목 GDP(국내총생산)가 2600조원을 훌쩍 넘는 경제 규모에서 없는 산업을 찾기가 더 어려운 시대다. 이제 산업의 초점은 주변에 존재하는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에 맞춰진다. 창업 지원 정책의 움직임도 여기에 가까워지고 지원 체계도 고도화 되고 있다.

창업지원법의 등장과 진화

한국에 창업 정책 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한 건 1980년대다. 1986년 창업지원법이 처음 제정되고, 같은 해 제1호 창업투자회사가 등장한다. 이듬해 창업초기기업들에 사무실과 장비, 네트워킹을 지원하는 창업보육센터(BI)가 설립됐다. 벤처·창업의 태동기였다. 이 시기 등장한 기업이 벤처1호 삼보전자엔지니어링(삼보컴퓨터)이다. 휴맥스(창업주 변대규), 다우기술(김익래), 메디슨(이민화), 비트컴퓨터(조현정) 등이 줄줄이 등장했다.

1990년대엔 코스닥 시장 출범과 벤처기업법 제정으로 제1차 벤처붐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다음을 비롯해 네이버, 넥슨, NC소프트, 컴투스, 네오위즈, 안랩, 한글과컴퓨터, 지마켓, 에코프로, 주성엔지니어링 등 익숙한 벤처1세대 기업들이 대거 쏟아진 시기다. 특히 IMF 당시 김대중 정부는 벤처기업 육성에 대대적인 드라이브를 걸었다. 구조조정 등으로 약화된 대기업 중심 경제에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외환위기로 150만에 육박하던 실업자를 중소기업과 창업기업으로 흡수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2001년 닷컴버블 붕괴로 벤처·창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크게 확산했다. 불모지가 된 벤처투자 시장에 재건이 필요했다. 이때 도입한 제도가 모태펀드(2005년)다. 벤처투자와 자금 순환 생태계가 본격적으로 구축된 시기다. 카카오와 우아한형제들, 비바리퍼블리카(토스 운영사), 무신사, 두나무, 컬리, 크래프톤 등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혁신생태계를 확장한 벤처 2세대가 대거 등장했고, 대부분이 모태펀드의 지원을 밑거름으로 성장했다.

벤처·창업 지원 정책에서 민간의 역할이 커진 건 2010년대다. 2013년 시작된 TIPS(팁스)가 대표적이다. 민간 투자자가 유망 스타트업을 선별해 자금을 투입하면 정부가 R&D 등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벤처·창업 정책은 2017년 중소벤처기업부 출범 이후 한층 고도화 된다. 2018년 창업-투자-회수-재도전의 선순환 구조를 제시한 것을 시작으로 K-유니콘 프로젝트, 해외 진출, 딥테크 스타트업 지원 등으로 범위와 내용을 키웠다.

올해 전 부처 창업 지원액은 3.5조...기술창업 집중

창업 지원이 고도화, 다각화 된 만큼 예산 규모도 만만치 않다. 올해 전부가 창업 지원에 투입하는 자금(3조4645억원)은 3조5000억원에 육박한다. 15개 중앙부처와 96개 지자체 등 모두 111개 기관이 총 508개 지원사업을 시행 중이다. 10년 전인 2016년 6개 중앙부처가 5764억원(65개 사업)을 투입했던 수준과 비교하면 6배 큰 규모다. 이 중 대부분인 93.9%(3조734억원)가 중기부에 집중돼 있다.

대표적인 사업은 예비창업패키지(491억원)→초기창업패키지(559억원)→창업도약패키지(728억원)로 이어지는 단계별 사업이다. 각각 예비창업자, 업력 3년 이내 기업, 업력 3~7년 기업의 사업화와 창업프로그램 등을 지원한다.

첨단산업 지원도 곳곳에 녹아 있다. 딥테크 기술 기반의 초격차 스타트업을 키우는 사업(1456억원)은 6대 전략산업·12대 기술 등을 가진 기업이 대상이다. 드론에 특화된 국방 신산업 분야 창업기업 지원, 경북 구미 방산혁신 클러스터 방산 업체 지원도 이뤄진다. 창업성장기술개발에 들어가는 예산만 7864억원이다. 팁스 지원도 여기에 포함된다.

특히 창업 지원책은 △스포츠산업 창업 지원(92억원) △예술분야 창업 지원(65억원) △청년식품 창업 성장 지원(14억원) △농식품 벤처육성지원(140억원) △전통문화 청년창업 육성 사업(32억원)등 분야도 분포돼 있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창업정책은 일반 기술창업에서 녹색·농식품·문화·관광·방산 등으로 세분화됐다"며 "특히 일반 창업지원에서 AI·딥테크 기술사업화로 R&D 지원의 무게가 옮겨졌다"고 전했다.

정부는 대규모 창업인재를 발굴하며 창업 저변을 넓히는 '모두의 창업 프로젝트'를 시행 중이다. 사실상 현 정부 창업 정책의 시그니처다. 사업계획서를 낸 기업에 단순히 돈을 지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멘토링-사업화-오디션-대국민 경연을 이어가 최종 200명(일반·기술 100명, 로컬 100명)을 선발하는 시스템이다. 이들의 후속 지원을 위해 정부는 500억원 규모 ‘창업열풍펀드’을 조성한다. 최대 1억원의 후속 사업화 자금도 지원한다. 1차 프로젝트에선 5000명을 선발하는데 6만명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2차선발 규모는 1만명으로 확대됐다.

▲지난달 30일 중국 톈진에서 열린 세계 지능 엑스포에서 유니트리로보틱스가 개발한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복싱을 하고 있다. 톈진(미국)/신화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중국 톈진에서 열린 세계 지능 엑스포에서 유니트리로보틱스가 개발한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복싱을 하고 있다. 톈진(미국)/신화연합뉴스

中 유니콘 157개...'중관춘'과 창업도시들

한국은 창업 저변을 확대하고 딥테크 분야로 정책의 축을 옮겼지만 당장 중국의 성과를 넘어서긴 쉽지 않다. 중국은 적극적인 창업 활동으로 2018년 64개였던 유니콘 수를 지난해 157개로 늘렸다. 중국에선 하루 평균 2만2000여개의 신생기업이 나온다는 분석도 있다. 딥시크, 문샷AI, 즈푸AI, 바이촨AI으로 대표되는 AI스타트업들은 미국의 주요 빅테크 기업과 경쟁해도 손색없는 기술력을 갖췄다. 이들의 기업가치가 2024년 기준 28억달러에서 1550억달러에 달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중국이 전기차와 배터리, 로보틱스에 투자를 늘리고 있는 만큼 산업용 AI가 중국 제조 산업 원동력이 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반면 국내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 이상) 수는 작년 말 기준 27곳이다. 리벨리온이 2024년에 이름을 올린 데 이어 퓨리오사AI와 갤럭시코퍼레이션이 지난해 합류했다. 올들어 업스테이지와 뤼큰테크놀로지스가 유니콘 반열에 오르면서 약 30곳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지만 중국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다 .

중국의 창업 열기는 특수하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창업 생태계를 키워온 건 한국과 일치하지만 정치, 문화와 연결된 추진력, 독보적인 내수 시장, 치열한 경쟁, 거대한 제조 생태계의 간극을 좁히기는 어렵다. 기업가정신학회는 벤처 30년을 기념해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오랜 기간 숙련된 전문 인재가 필수적이다. 과학자 중심의 창업을 촉진하는 것이 장기적인 국가 산업경쟁력을 좌우한다"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창업 생태계로 재편하고 모태펀드의 구조를 정책 목표별로 세분화해 장기적인 지원 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특히 중국의 실리콘밸리인 스타트업 클러스터 '중관춘'에 대한 관심이 높다. 중관춘은 중국 최초의 국가급 첨단 기술 산업 개발구이자 최초의 국가 자주혁신 시범구다. 베이징대, 칭화대, 과학연구기관, 실험실이 집중돼 있다. 김민석 전 국무총리가 6월 직접 시찰에 나선 곳이기도 하다. 자본·인재·인프라가 여기에만 집중되진 않는다. 중국은 베이징, 선전, 항저우, 상하이, 청두와 충칭으로 창업 생태계를 확장했다. 미국 역시 실리콘밸리 일극 체제를 넘어 뉴욕, 텍사스 오스틴, 보스턴, 시애틀을 기반으로 혁신 기업을 키우고 있다.

우리 정부도 창업도시 정책을 추진 중이다. 우리 벤처창업 생태계의 자본·인재·인프라가 서울과 판교에 지나치게 집중되면서 수도권을 제외한 창업도시 육성의 필요성이 커졌다. 정부는 내년까지 창업도시 10곳을 조성할 계획이다. 지역 대학·연구기관 인재, 지역 산업을 묶고 여기에 정부의 R&D 지원을 결합해 창업과 성장이 선순환하는 구조를 만드는 게 핵심이다. 당장 올해 대구·광주·대전·울산 등 4개 창업도시에서 창업기업 278개사를 모집한다. 창업도시에 있는 기업뿐 아니라 해당 지역으로 이전을 희망하는 기업도 지원 대상에 포함할 예정이다. 이전 기업에는 자부담금의 10%를 지방정부가 추가 지원한다.

내년 창업지원만 4조원 안팎 예상...엑시트가 관건

창업 정책을 주도하는 중기부의 내년 예산안 규모는 사상 처음으로 18조원을 넘는다. 지출 구조조정으로 약 3조원의 재원을 아껴 모두의 창업과 모태펀드, 신성장 분야 등에 재투자하기로 했다. 내년 모태펀드 출자 규모는 역대 최고 수준인 1조3000억원, 모두의 창업 예산은 4411억원에 달한다. 중기부 창업실 예산 규모도 2조원에 육박하고, 전 부처 및 전 기관 창업 지원액 역시 4조원 안팎이 될 거란 관측도 있다.

특히 기존 창업지원 사업과의 중복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예비창업패키지는 모두의 창업으로 편입된다. 또 2011년 설립돼 청년 창업가를 집중적으로 육성해온 청년창업사관학교는 사실상 제 역할을 다하면서 재도전성공학교로 전환되는 등 개편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다만 창업 생태계를 활성화하기 위해선 엑시트(투자회수) 재검토로 불가피하다. 창업기업에 투자된 자금은 기업공개(IPO)나 인수합병(M&A)을 통해 회수해 새로운 기업에 재투자돼야 한다.

창업→성장→투자→회수→재투자의 순환구조가 완성되지 않으면 벤처캐피탈(VC)은 투자금을 거두지 못해 LP에게 수익을 돌려주지 못한다. 자금 회전속도가 떨어지면 창업기업에 돈을 넣을 투자자는 없다. 결국 신규 펀드 결성이 어려워지고 초기·후속 투자가 위축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회수 장치를 강화하지 않으면 창업 저변을 아무리 넓혀도 생태계 활성화에 한계가 불가피하다.

현재 국내 회수시장에선 IPO 의존도가 유독 높다. 스타트업을 살 인수자의 저변이 얇고, M&A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등이 굳어지면서 인수합병(M&A)를 통한 회수시장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국내 벤처투자회사·조합의 IPO 회수 비중은 지난해 37.3%를 기록했다. 2022년 24.3% 대비 더 늘었다. M&A이 벤처 엑시트의 주요 통로로 여겨지는 미국과는 차이가 크다. 미국은 M&A가 전체 회수 경로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금융투자협회는 최근 벤처 회수시장 활성화 구상을 밝혔다. 황성엽 협회장은 3월 이재명 대통령 주재 자본시장 간담회에서 향후 3년간 금융투자업계가 20조원 이상의 모험자본을 공급하고 회수시장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대표는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창업생태계를 만드는 게 중요하지만, 회수 역시 잘 돼야 한다”며 “돈을 넣어주는 건 쉬운 일이다. 규제를 없애고 회수가 잘 되도록 해 창업가들이 창업 후 성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핵심”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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