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논단] ‘통상의 핵’으로 복귀한 에너지안보

입력 2026-07-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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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확보·공급망 구축에 대응 갈려
외교·물류·금융 결합한 전략 자산
패키지형 산유국 통상 협력 강화를

중동 정세가 다시 격랑에 빠지면서 국제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요동치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의 통항 차질은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를 넘어 나프타·헬륨·암모니아 등 핵심 산업 원료의 수급을 흔들고 있다. 에너지 위기가 곧 제조업 공급망 위기로 전이되는 모습이다. 이번 사태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에너지 안보를 비축과 수급 관리의 영역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되며, 시장 확보와 공급망 구축을 담당하는 통상정책의 중심 의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호르무즈해협은 세계 에너지 공급망의 대표적인 병목 지점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세계 해상 원유 교역량의 약 25%가 이 해협을 통과하고 그중 80%가 아시아로 향한다.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의 LNG 수출 대부분도 이곳을 지난다. 해협을 우회할 수 있는 송유관의 수송 능력은 제한적이어서 통항이 차질을 빚으면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기 어렵다.

한국은 충격에 특히 취약하다. 원유의 약 70%, LNG의 약 20%를 중동에 의존하는 데다 석유화학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도 상당 부분 수입한다. 나프타 공급이 끊기면 그 충격은 플라스틱·포장재·자동차부품·전자제품 등으로 확산된다. 헬륨 부족은 반도체와 의료 분야에, 암모니아 부족은 비료와 발전 분야에 영향을 준다. 중동발 공급 충격이 ‘가격 상승형 위기’를 넘어 생산라인을 멈추게 하는 ‘공정 중단형 위기’로 바뀐 것이다.

그동안 에너지 안보 정책은 비축유 방출, 수입선 다변화, 국내 가격 안정에 집중돼 왔다. 물론 긴급 상황에서는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각국이 동시에 물량 확보에 뛰어들면 구매 가격과 운임이 상승하고, 장기계약을 보유한 국가와 기업이 우선권을 갖게 된다. 선박과 항만, 보험이 확보되지 않으면 계약한 물량조차 들여올 수 없다. 에너지는 이제 일반 상품이 아니라 외교·안보·물류·금융이 결합된 전략자산이 됐다.

이제 에너지 통상은 단순한 자원외교와 달라야 한다. 첫째, 공급선 다변화를 일회성 구매가 아니라 제도화된 통상협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미국·캐나다·호주·중남미·중앙아시아 등 대체 공급국과 원유·LNG·나프타 및 핵심 원료를 포괄하는 공급망 협정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장기 구매계약, 공동 비축, 위기 시 우선 공급, 수출 제한 사전 통보, 통관 간소화 등을 협정에 명시해야 한다.

둘째, 중동과의 협력도 호르무즈 안쪽에서 원료를 선적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얀부항처럼 해협 밖에 위치한 수출 거점과 저장시설을 적극 활용하고, 주요 산유국과 공동 저장기지 및 우회 수송 인프라에 투자해야 한다. 한국 기업이 에너지 인프라 건설에 참여하고 그 대가로 장기 공급권이나 긴급 인출권을 확보하는 패키지형 통상협력이 필요하다.

셋째, 전략비축의 개념도 원유 중심에서 산업 원료로 넓혀야 한다. LNG·나프타·헬륨·암모니아처럼 대체가 어렵고 생산 중단 파급효과가 큰 품목을 선별해 최소 비축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 비축뿐 아니라 민간 재고에 세제·금융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정유·석유화학·반도체·물류기업이 정보를 공유하는 조기경보체계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넷째, 해상운송과 금융을 공급망 정책에 포함해야 한다. 위기 시 국적 선박을 확보하고 전쟁보험료와 우회 운송비를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주요 우방국과 에너지 수송로 보호, 선박 위치정보 공유, 대체 항만 이용을 위한 협력도 강화해야 한다. 에너지 공급망은 생산지 확보뿐만 아니라 자원을 실어 나를 선박과 항로, 항만, 보험까지 연결돼야 비로소 작동한다.

에너지 전환 역시 에너지 안보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재생에너지·원전·수소와 전력망 투자는 탄소 감축뿐 아니라 수입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는 가장 근본적인 공급망 정책이다. 다만 전환 과정에서 특정 연료나 특정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의존이 생기지 않도록 속도와 구성을 정교하게 관리해야 한다.

중동사태 이후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것은 위기 속에서도 필요한 에너지와 원료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공급망이 끊긴 뒤 비싼 가격으로 긴급 물량을 사 오는 것은 위기 대응일 뿐 전략이라고 할 수 없다. 평상시에 공급국·수송로·비축·투자를 하나의 협력망으로 만들어 두는 것이 진정한 에너지 통상이다.

중동 불안은 언젠가 완화될 수 있지만 호르무즈해협에 집중된 구조적 위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 위기를 넘기는 데 만족하지 말고 에너지 조달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에너지 안보를 통상정책의 중심으로 복귀시키는 것, 그것이 반복되는 중동 위기에서 한국 경제가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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