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부회장이던 시절, 그의 주특기는 ‘스탠딩 백브리핑(Standing Back Briefing)’이었다. 회장이 된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현장 경영’을 자주 하곤 했다. 수많은 기자가 그의 뒤를 졸졸 따르며 한마디를 얻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웠을까. 그는 언제나 공식 행사 후 기자들과의 백브리핑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특히 2017년 신세계그룹이 경기 고양시에서 주관한 채용박람회 이후 가진 그와의 백브리핑을 잊을 수 없다. 너무 기억에 오래 남아, 별도의 유튜브 영상까지 만들었을 정도다. (이 영상은 최근 여러 유튜버가 ‘기자들과 솔직 대화하는 정용진’이란 쇼츠로 재구성해 새삼 화제 몰이 중이다.)
당시 백브리핑의 화두는 신세계그룹의 11번가 인수합병설이었다. 경쟁사인 롯데그룹도 인수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 유통업계 출입 기자들은 이와 관련한 상황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정 회장은 여러 난감한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솔직하게 답했다. 그만의 유머러스한 답변이 계속되니, 처음에 경직됐던 분위기도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질의응답이 30분 가까이 계속되자,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고 있던 팔에 저림까지 왔다. 급기야 정 회장이 되레 채근했다. “더 질문 없으시죠? 진짜죠?”라는 그의 역질문에 기자들은 모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진 해산했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기자들과 다시 마주했다. 예정된 그룹 행사도, 현장 경영도 아닌 ‘대국민 사과문 발표’ 기자회견이었다. 전 국민을 공분케 한 이른바 ‘5·18 탱크데이’ 사건이 발단됐다. 대한민국 민주화를 견인한 ‘5·18 민주화운동’과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스타벅스코리아가 함부로 마케팅에 활용했다는 비난 때문이었다. 이재명 대통령마저 “저질 장사치의 막장 행태”라고 직격했다. 사태 발생 직후 정 회장은 즉각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비판 여론은 더 거세졌고, 정치권을 중심으로 그와 스타벅스를 향해 ‘극우 좌표 찍기’ 논란까지 확산했다.
결국 사태 발생 8일 만에 정 회장은 연단에 올랐다. 그는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겠다. 모든 것은 제 잘못”이라며 세 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의 사과에 대해 정치권 일각에선 “진정성 있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여론도 다소 진정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아쉬웠다. 그가 언제나 성실히 임했던 백브리핑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국민 사과를 끝낸 정 회장은 홀연히 회견장을 떠났고, 연단은 신세계그룹 임원진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정 회장이 사과한 함의에 대해, 차후 계획에 대해선 제대로 백브리핑하지 못했다. 그것은 본인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일 터. 임원진들은 그저 스타벅스코리아의 이번 사태 관련 자체 조사 결과만 설명했다. 대부분 의혹에 대해 “고의성이 없었던 것 같다”는 모호한 설명이 계속됐다. 결국, 이번 마케팅을 진행한 임직원들이 과연 의도한 것인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할 공은 경찰에게 넘어갔다.
속 시원하지 않았다. 정용진 회장답지 않은 회견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미리 준비한 원고만 읽고 유유히 자리를 떠난 그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어떤 질문에도 자신 있게 답할 준비가 돼 있던 ‘백브리핑맨’은 없었다. 많은 국민이 이날 듣고 싶었던 것은 미리 준비한 딱딱한 사과문이 아니라, 현장에서 나오는 즉석 질문에도 진정성 있게 답하는 그의 생생한 목소리였을 것이다.
지금 모두가 정 회장에게 궁금해하는 그 질문을 던져본다. “정용진 회장님, 질문 있습니다. 5·18 유족들에게 직접 사과하기 위해 ‘언제’ 광주를 찾으실 겁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