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국의 대형마트와 편의점 등지에서 종량제 쓰레기봉투 품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인당 구매 수량을 제한하는 안내문이 나붙고, 매대에는 빈자리만 덩그러니 남은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글로벌 원자재 공급망 불안이 원인이라지만, 유독 한국에서 다른 생필품도 아닌 쓰레기봉투 사재기가 맹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체 이유가 뭘까요.
대체 불가한 절대 필수재이자 '현금'과 같은 특수성
▲중동사태로 국내에서 종량제봉투를 사재기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24일 서울의 한 자치구 자동판매기에 종량제봉투가 진열돼 있다. 종량제봉투를 판매하는 종량제닷컴은 홈페이지에 ‘최근 국제 정세의 영향으로 종량제봉투 제작부터 수급 및 입고 일정이 원활하지 못합니다’라는 공지를 내걸었다. 소셜미디어(SNS) 및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도 ‘비닐대란’과 관련 소비자 불안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동전쟁 여파로 비닐 핵심 원료인 ‘나프타’ 공급이 불안정해진 데서 비롯됐다. 전체 소비량의 약 40~4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다, 국내로 수입되는 나프타의 54%는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는데 이란이 이 해협을 봉쇄하면서 나프타 공급이 끊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신태현 기자 holjjak@
우선, 한국에서 종량제 봉투는 단순한 비닐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절대 필수재'입니다. 1995년 쓰레기 수수료 종량제가 도입된 이후, 규격 봉투를 사용하지 않고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불법이 되었습니다. 라면이나 생수는 브랜드나 종류를 바꿀 수 있고 휴지 대신 물티슈를 쓸 수도 있지만,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자체에서 발행한 종량제 봉투가 필요합니다.
여기에 종량제 봉투가 지닌 '환금성'과 '보관의 용이성'이 사재기 심리에 불을 붙였습니다. 종량제 봉투는 유통기한이 없고 썩지 않으며, 부피가 작아 대량으로 사두어도 집안 공간을 거의 차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가격이 떨어질 일은 없고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향후 가격이 오를 가능성만 엿보이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미리 사두는 것이 무조건 이득인 일종의 '안전 자산'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원자재 수급 불안 뉴스가 나오자마자 시민들이 즉각적으로 마트로 달려가 빈 봉투부터 쓸어 담은 이유입니다.
▲24일 경기 안산시의 한 플라스틱 필름 제조 공장에서 중동 사태에 따른 폴리에틸렌 수급 불안으로 인해 소폭의 농업용 필름을 제작하는 압출기의 일부 가동이 중단, 1대만이 가동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러한 공포 매수를 촉발한 근본적인 원인은 중동 정세 불안으로 인한 석유화학 원자재 '나프타'의 수급 위기입니다. 나프타는 쓰레기봉투의 주원료인 폴리에틸렌(PE)을 만드는 핵심 유분입니다. 최근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분쟁 격화로 글로벌 원유 주요 운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물류가 차질을 빚으면서, 중동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내 화학 업계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국제 나프타 가격이 연초 대비 급등하자 원료를 구하지 못한 대형 석유화학 기업과 비닐 가공 중소업체들이 연이어 공장 가동을 축소했습니다. 이 소식이 '쓰레기봉투 생산 중단 위기'로 번역되어 시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한 것입니다.
정부의 비상 대응…외신이 짚은 '공급망의 취약성'
▲수원특례시 자원순환센터에서 직원이 종량제봉투 비축 물량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제공=수원특례시)
정부와 지자체는 사태 진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 지자체에 비축된 완제품 재고는 평균 3~6개월 분량에 달해 당장 쓰레기 대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또한, 종량제 봉투의 가격은 지자체 조례로 묶여 있어 원료비가 오른다고 당장 판매가가 폭등하지도 않습니다. 정부는 장기전에 대비해 국내 생산 나프타의 수출을 제한하고,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재활용 원료로 봉투 생산을 늘리는 등 다각도의 대응책을 펴고 있습니다.
한편, 해외 주요 매체들은 한국의 이번 사태를 통해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을 흥미롭게 짚어내고 있습니다. 글로벌 패키징 산업 전문 매체 '패키징 인사이트'와 해외 매체 '에브림 아가치' 등은 중동의 지정학적 갈등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한국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어떻게 직접적으로 타격하는지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특히, 자원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가 글로벌 위기에 얼마나 구조적으로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