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그사세’가 궁금하다면…말갖춤으로 엿보는 럭셔리의 세계

입력 2026-01-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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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 붉은 말의 해에 돌아본 왕과 귀족의 마구 취향
화려한 삼국의 안장부터 조용한 럭셔리 조선의 안장까지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의 해를 맞아 경기 고양 서삼릉 인근 한국마사회 원당종마목장에서 말들이 대지를 박차고 힘차게 달린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의 해를 맞아 경기 고양 서삼릉 인근 한국마사회 원당종마목장에서 말들이 대지를 박차고 힘차게 달린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의 해를 맞아 유통가는 분주하다. 상품 패키지부터 판촉물, 쇼핑몰 장식까지 말 이미지를 앞세운 마케팅이 이어지고 있다. 과자와 빵, 주류, 패션 등 분야도 다양하다. 말 한 마리가 불러오는 ‘좋은 기운’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누릴 수 있는 시대다.

말을 이미지로만 소비하는 데 그치지도 않는다. 요즘은 승마 체험 앱을 통해 가까운 승마장의 시설과 코치, 말 상태까지 확인하고 예약할 수 있다. 10~20분 체험 비용은 3만~4만 원 선으로, 말은 더 이상 먼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 말은 달랐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은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최고 권력자의 정통성과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천마’, ‘신마’ 같은 영험한 존재를 곁들이는 설정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상징이었다. 고대 무덤 벽화나 중세 회화를 떠올려봐도, 말을 타고 행차하거나 전투·사냥에 나서는 인물은 늘 왕이나 장수였다. 평범한 백성이 말을 타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고대 말갖춤을 복원해 화려한 꾸며진 말모형이 한국마사회 말박물관에 전시된 모습. (사진제공=한국마사회)
▲고대 말갖춤을 복원해 화려한 꾸며진 말모형이 한국마사회 말박물관에 전시된 모습. (사진제공=한국마사회)

조선시대 말 한 필의 가격이 노비 2~3명과 맞먹었다는 기록만 봐도 말이 얼마나 값비싼 자산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수의 지배층만이 말을 소유하고 탔고, 말은 자연스럽게 ‘고귀한 존재’가 됐다. 그만큼 말에 씌워지는 장비, 즉 말갖춤(마구)도 극진한 보살핌과 화려한 꾸밈을 받았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각종 마구는 이를 잘 보여준다. 고대의 말갖춤은 왕과 왕족의 무덤 속 껴묻거리로 출토된 경우가 많은데, 재갈과 안장, 말방울, 말띠꾸미개 하나하나가 금·은·동으로 정교하게 제작됐다. 무덤 주인의 왕관이나 장신구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왕관의 떨잠을 닮은 말띠꾸미개다. 말띠꾸미개, 즉 운주(雲珠)는 말 몸에 드리워진 여러 끈이 교차하는 지점을 고정하면서 장식 기능까지 하는 마구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수십 개의 장식이 반짝였을 것을 떠올리면, 그 위에 올라탄 인물이 얼마나 고귀해 보였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 순은말방울 (사진제공=한국마사회)
▲통일신라 순은말방울 (사진제공=한국마사회)

말 가슴에 달아 소리로 귀신을 쫓고, 도난이나 충돌 사고를 예방하며 신분까지 드러냈던 말방울도 빼놓을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무관의 관직에 따라 금·은·동·철 등 재질이 다른 방울을 사용해 병사를 지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부분 청동이나 금동으로 제작됐지만, 한국마사회 말박물관에는 통일신라시대 지름 10㎝가량의 순은 말방울 한 쌍도 전시돼 있다. 고대 마구의 화려함이 어디까지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다.

말 등에 얹는 안장 역시 삼국시대에는 극도로 화려했다. 사람이 앉는 좌목은 나무로 만들어져 남아 있지 않지만, 금속으로 만든 앞가리개와 뒷가리개는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얇은 금동판 두 겹을 용문이나 당초문으로 파내고, 그 사이에 비단벌레 날개를 넣어 옥빛이 비치게 만든 사례도 있다. 무덤 주인이 저승에서도 멋지게 차린 말을 타고 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을 법하다.

이처럼 소수에게만 허락된 말갖춤의 화려함은 천 년 넘게 이어졌지만, 15세기 조선의 개국과 함께 큰 변화를 맞는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은 생활 전반에서 사치를 경계하고 검소와 절제를 중시했다. 의식주가 그랬듯 말갖춤도 소박하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금·은·동으로 장식한 안장은 거의 사라졌고, 대신 비교적 귀한 재료로 꼽힌 상어가죽(沙魚皮)이 앞뒤 가리개에 덧대어졌다. 무늬도 없고 눈에 띄게 화려하지도 않지만, 요즘 말로 하면 ‘조용한 럭셔리’에 가까운 선택이다.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품격이다. 이마저도 정삼품 당상관 이상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 ‘경국대전’에 명시돼 있었다. 말갖춤 장식에 대한 통제가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보여준다.

과천에 있는 한국마사회 말박물관에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이 사용했던 검은색 나무 안장도 남아 있다. 나무틀에 면포를 씌운 뒤 흑칠을 했고, 앞가리개에는 사슴뿔을 사용해 상감기법으로 기린 문양을 새겼다. 기린은 말의 몸에 날개가 있고 상서로운 기운을 뿜어낸다는 상상의 동물로, 조선 단종 이후 제왕의 적자를 상징해 대군의 흉배와 관대에 쓰였다고 전해진다. 기린문에 금분을 입혔지만, 전체 인상은 절제되고 담담하다. 조선 미감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마사회 관계자는 “말은 더 이상 왕과 귀족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말에 담긴 상징과 이를 둘러싼 장식의 세계는 여전히 흥미롭다”며 “붉은 말의 해를 맞아 말갖춤을 통해 과거 권력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주말을 보내는 색다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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