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외교 사절단 역할 톡톡히
보호무역주의 지속…재계 총수 역할 당분간 클 듯

삼성·LG·현대차·한화·SK·롯데 등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이 올해 해외 투자와 관세 협상 등에서 직접 발로 뛰며 기업의 불확실성을 축소하고, 글로벌 생산기지 확대에 나섰다.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정부와 재계 협력이 앞으로도 긴밀해질 전망이다.
가장 주목 받은 성과는 한·미 관세 협상 타결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 3일(현지시간) 한국의 대미 수출 자동차 관세를 15%로 소급 인하하는 내용을 관보에 올렸다. 이는 북미 시장에서 일본·유럽연합(EU)과 같은 수준의 관세 조건을 확보해 한국 자동차 수출의 경쟁력을 회복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과거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 최대 25%까지 관세를 부과할 수 있음을 시사했으나, 11월 1일부터 소급해 15%로 인하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관세 협상 과정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정기선 HD현대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등 재계 총수들이 현장에서 정부 협상팀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다. 이들은 미국을 찾아 가용할 수 있는 대미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는 등 협상단을 측면 지원했다. 또 대규모 투자 계획을 제시하며 협상 동력을 제공했다. 이 회장은 텍사스 파운드리 공장 등 2030년까지 370억달러(약 54조 원) 이상 투자를 약속했다. SK그룹은 배터리, 반도체, 친환경 분야에 5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한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39억 달러(5조6000억원)를 투입해 첨단 패키징 공장을 짓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향후 4년간 260억 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을 냈으며, LG그룹도 애리조나와 미시간·테네시 등에 배터리 완제품과 소재 공장을 건설 중이다. 총수들이 지난 10월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트럼프 대통령 소유 클럽에서 열린 골프 행사에 참석하는 장면도 연출됐다.
현대차·기아는 이전에 예상된 25% 관세 부담이 줄면서 미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나이스신용평가는 현대차그룹이 관세 25%를 적용받을 때 관세 비용으로 연간 8조4000억 원을 부담해야 하지만, 15%로 인하되면 비용이 5조3000억 원으로 3조원 이상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또 반도체·AI·기술 장비를 중심으로 한 삼성과 SK의 미국 내 공급망 재편 계획도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관세 협상 직후 곧바로 이어진 민관 합동회의에서도 재계는 국내 투자 및 고용 확대 계획을 대거 약속하며 정부와의 협력 의지를 재확인했다.
재계 총수들의 이같은 역할이 올해만의 한시적 이벤트에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지속되는 가운데, 보호무역주의는 여전히 주요국의 정책 기조로 남아 있다. 자동차, 배터리, 반도체, AI·데이터 인프라 등 전략 산업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고 있어 당분간 총수들이 구원 투수 역할을 계속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이재용·최태원·정의선·구광모 등을 포함한 7개 그룹 회장단과 회동을 갖고 "정례적으로 만나자"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기업들이 느끼는 부담은 만만치 않다. 한 재계 관계자는 "주주 입장에서는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야 할 총수들이 대통령 해외 순방에 매번 따라다니는 게 과연 맞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면서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 있고 민간의 역할이 있는데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