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인 겸업·부업교수 임용 급증해
연구·교육에 헌신하는 학자 드물어

한때 ‘사장님’ 하고 부르면 길 가는 사람 절반이 뒤를 돌아본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자영업 사장이 많은 것을 빗대는 말이다. 지금 교수가 그런 꼴이다. 요즘 웬만한 사람이면 교수 직함 하나 정도 갖고 있다. 대학에 근무하지도 않는데, 교수라 불리는 사람이 많다.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교수 타이틀을 걸고 다닌다.
원래 교수는 학자를 말한다. 직업으로 대학교수의 사명은 진리의 탐구와 전파이다. 학술연구와 학생강의가 교수의 본업인 것이다. 그런데 연구도 하지 않고 교육도 하지 않는데 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한국형 K-교수가 유행하는 것이다.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이 시작된 유럽에서 교수의 권위는 대단하다. 첨단 학문을 연구하며 사회 지도층이 될 대학생을 가르치는 최고의 지성인 대접을 받는다. 독일에서 대학교수의 사회적 지위는 최상급이다. 교수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의 경제 부흥을 주도한 콘래드 아데나워 총리는 퇴임 후에 총리라기보다 교수로 불리길 원했다고 전해진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교수 전용 보행로가 있다. 캠퍼스 중앙 정원의 대형 잔디밭을 질러가는 길은 교수만 다닐 수 있고 학생들은 바깥으로 다녀야 한다.
미국 대학은 교수에게 연구의 수월성을 압박하며 서바이벌 게임으로 내몬다. 고된 박사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되어도 재임용되려면 밤잠 안 자고 연구에 전념해 논문을 써야 한다. 오로지 논문 실적만으로 승진과 연봉이 결정되니 논문을 못 내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Publish or Perish’라는 표현이 통용된다. 논문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죽도록 고생하지만 일단 정교수로 승진하면 평생 정년을 보장받아 70·80이 넘도록 교수로 재직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서구식 대학 교육이 도입되며 교수의 권위는 매우 높았다. 1970~1980년대 경제개발과 과학발전을 추진하던 시절에 교수는 유일한 전문가 집단으로서 정부의 정책에 직접 참여하여 장관으로 활약하였다. 당시에 교수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이 힘들었다. 대학은 얼마 안 되었고 교수는 희소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대학설립이 자유화되어 사립대학이 급격히 증가하며 교수 숫자도 늘어났다. 하지만, 교수가 많아졌어도 대부분은 연구와 강의에만 전념하는 전임교원이었다.
지금처럼 교수 같지 않은 교수가 많아진 것은 한국적인 특수한 배경에 기인한다. 우선, 대학 재정난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이명박 정부가 대학 등록금을 동결한 이후 전임교수를 채용할 여유가 없어진 대학들이 외부인을 시간 강사로 활용해 강의를 맡기기 시작했다. 산학협력이라는 명분에 재능기부로 포장해 강사료를 적게 주고 이를 보상하는 방법으로 교수라는 직함을 붙여주었다. 그래서 겸업이나 부업으로 교수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어차피 다른 본업이 있으니 강사료에 구애받지 않고 한두 과목 강의하며 교수로 대우받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심지어 교수직을 내세워 외부에서 돈벌이 나서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방송이나 언론에 겸임교수가 전문가로 등장하기도 한다. 기업체에 사외이사나 자문교수로도 참여한다. 이렇게 교수로 대접받고 활동하기 위해 몇 푼 안 되는 강사료에도 불구하고 비전임 교수를 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선다.
한 가지 새로운 현상은 정치인도 교수 대열에 합류한다는 것이다.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정치인이 잠시 쉬기에 대학만큼 좋은 곳이 없다. 대학은 유력 정치인이 나중에 다시 힘 있는 자리로 복귀하면 덕을 볼까 싶어 초빙한다. 이런 정치인은 강의도 하지 않고 연구실을 배정받으며 통상 초빙교수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세월호 사건 이후 공직자의 재취업제한이 강화되며 한시적으로 머무르는 정거장으로 대학을 이용하는 고위공직자들도 늘어났다. 대학도 퇴직 관료를 환영한다. 전관의 영향력을 이용해 정부의 국책과제 따오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직자들은 대학에서 급여를 주며 특임교수나 산학부총장으로 모신다.
이와 같은 추세를 반영하여 교수의 호칭도 매우 다양해졌다. 예전에 교수는 직급에 따라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로 단출하게 구분됐다. 지금은 수없이 많은 교수 직함이 존재한다. 대우교수, 겸임교수, 협동교수, 기금교수, 초빙교수, 특임교수, 석좌교수, 산중교수 등. 이름만 들어서는 무슨 역할을 하는 교수인지 알지 못한다. 대학의 교직원도 정확히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니 일반인은 얼마나 혼동이 되겠는가.
교수직이 개방되며 교수가 많아지고 교수 호칭도 다양하지만, 교수다운 교수는 별로 없다. 우리 주변에 학문연구에 매진하고 학생교육에 헌신하는 교수가 얼마나 되는가. 학문적으로 권위 있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학자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많아진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