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경 여금넷 회장 “혼자 달리던 ‘외로운 러너’…후배 위해 ‘길닦는 리더’로”[K 퍼스트 우먼①]

입력 2025-09-24 05:30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본 기사는 (2025-09-23 18:00)에 Channel5를 통해 소개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유리천장은 유독 금융권에서 더 높게 느껴진다. 결혼하면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결혼 퇴직 각서’가 존재하던 시절, 여성은 근무 첫날부터 제도적 차별에 맞서야 했다. 그럼에도 ‘국내 최초 여성 외환딜러’로 이름을 새긴 김상경 여성금융인네트워크 회장은 길을 개척하며 한국 금융사의 새 이정표를 세운 인물이다. 남성 중심의 딜링룸에서 편견과 시선을 견디며 오직 성과로 이름을 각인시켰고, 수석 딜러까지 올라섰다. IMF 외환위기 직후에는 한국외환은행 사외이사로 발탁돼 금융권 지배구조 현장에 여성의 존재감을 처음 드러냈다.

김 회장의 시선은 다음 세대로 향했다. 2003년 ‘여성금융인네트워크(여금넷)’를 창립한 뒤 20년 넘게 후배 여성 리더들의 금융권 진출 무대를 넓히는 데 힘써왔다. 국제 콘퍼런스를 열고 글로벌 금융 리더들을 초청, 성별 다양성의 가치를 금융권에 각인시키는 데 역점을 두는 등 금융권 ‘큰언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러한 행보는 창간 15주년을 맞은 이투데이가 준비한 ‘K 퍼스트 우먼 : 한국 경제의 최초를 연 그녀들’ 시리즈의 취지와 맞닿아 있다. 스스로 ‘최초’의 역사를 쓴 것도 모자라 후배 세대가 당당히 ‘최고’로 성장할 무대를 넓혀온 그를 이번 기획 시리즈의 첫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다.

국내 외환시장 첫 여성 딜러...3년 만에 수석 자리 꿰차
매일 성과에 집착하며 달리던 중...두 딸 키우며 '리더의 책임' 깨달아
외환 위기 이후 여성 리더십 흔들...여금넷 세워 연대ㆍ소통 창구 마련
의사결정권 있는 여성임원 손에 꼽혀...다양성 통해 조직경쟁력 높여야

▲서울 중구 퇴계로 한국국제금융연수원에서 만난 김상경 여금넷 회장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재들이 함께 어우러질 때 조직 역동성이 살아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픽=신미영 기자 win8226@·사진=고이란 기자 photoeran@)
▲서울 중구 퇴계로 한국국제금융연수원에서 만난 김상경 여금넷 회장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재들이 함께 어우러질 때 조직 역동성이 살아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픽=신미영 기자 win8226@·사진=고이란 기자 photoeran@)

“리더의 책임은 자기 자리에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나은 길을 여는 것이다.”

김상경 여성금융인네트워크 회장이 개인의 성취보다 ‘다음 세대의 무대’를 강조하는 이유다. 그는 2003년 여금넷을 창립한 이후 20년 넘게 여성 금융인들의 진출 무대를 넓히는 데 힘써왔다. 매년 국제 콘퍼런스를 열어 IMF 총재와 글로벌 금융사 리더들을 초청했고, 국내 금융지주 회장들도 직접 토론에 참여했다.

성과에만 매달린 '외로운 러너'

김 회장의 행보는 치열한 경쟁에서 비롯됐다. 그는 1977년 아메리칸익스프레스에 입사해 국내 최초 여성 외환딜러로 경력을 시작했다. 결혼하면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결혼 퇴직 각서’가 존재하던 시절, 딜링룸은 철저히 남성 중심이었다. 존재 자체가 늘 시험대 위에 올라가는 것이었고,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그는 ‘은행은 결국 수익으로 말하는 곳’이라는 원칙을 잊지 않고, 혁혁한 성과를 증명해 3년 만에 ‘수석 딜러’ 자리에 올랐다. 김 회장은 “차별과 편견은 반드시 존재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전문성과 성과로 돌파하면 더 큰 길이 열린다는 걸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외환 딜링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리스크 관리 능력이 오히려 경쟁력이 됐다. 김 회장은 “외환시장은 작은 오판이 치명적 손실로 이어지는 곳이라, 여성 딜러는 큰 리스크를 저지르지 않고 안정적으로 시장을 운영한다는 신뢰를 얻게 된다”면서 “그 부분이 경영진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매일 성과에 매달리던 시절 자신의 모습을 ‘외로운 러너’에 빚댔다. 그는 “성과로 제 존재를 입증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동료나 후배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저는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만 보고 뛰던 외로운 러너였다”고 고백했다.

변화는 두 딸을 키우면서 찾아왔다. 그는 개인의 성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아이들이 더 큰 장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 것이다. 김 회장은 “리더의 몫은 나 혼자 살아남는 데 있지 않고, 다음 세대가 더 넓고 평평한 운동장에서 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깨달음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김 회장은 2003년 여성금융인네트워크(여금넷)를 창립했다. IMF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 여파로 여성 관리자들이 가장 먼저 밀려나던 시기였는데, 이를 그저 넋 놓고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그대로 두면 금융권에 여성 리더의 계보 자체가 끊기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했다”고 결연한 눈빛을 보였다.

20여년 만에 금융권 여성 리더십 구심점

여금넷은 설립 초창기에는 30여 명 남짓한 여성 간부들이 모였지만 지금은 수백 명 규모로 성장했다. 20여년의 역사를 쌓으며 멘토링, 리더십 교육, 국제 세미나로 활동 영역을 확대, 명실상부 금융권 여성 리더십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여금넷을 상징하는 대표 행사는 매년 열리는 ‘국제 여성금융인 콘퍼런스’다. 특히 2017년에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가 방한해 직접 기조연설을 했고, 블랙록·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금융사 리더들이 연단에 섰다. 국내 금융지주 회장들도 토론자로 나서 다양성 확대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논의했다. 올해 콘퍼런스에서는 ‘한국형 여성금융인 헌장’ 제안과 함께 글로벌 30% 클럽 회장의 기조연설을 계기로 국제 연대도 할 예정이다.

김 회장은 “자금도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여성 리더들의 목소리를 한국 금융권에 직접 들려주고 싶었다”며 “이후 국내에서도 여성 임원 비율 목표를 논의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콘퍼런스 성과를 평가했다.

금융권 첫 여성 사외이사 타이틀

김 회장은 1999년 한국외환은행에 선임되며 ‘금융권 최초의 여성 사외이사’의 길도 개척했다. 이후 여러 기업과 공공기관 이사회에 참여하며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양성이 발휘하는 힘을 직접 체감했다. 그는 “여성 이사가 이사회에 참여하면 의사 결정의 관점이 훨씬 다양해진다”면서 “남성 중심의 논의에서 간과하기 쉬운 기업 리스크나 직원 복지, 지속가능성 문제를 자연스럽게 다루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외환은행과 메리츠자산운용 사외이사 시절, 여성 중간관리자의 경력 정체 문제를 지적하며 승진 제도 개선을 제안했다. 일부 부서에서는 실제로 여성 직원 승진율이 개선되는 성과도 냈다.

김 회장은 “많은 기업은 이제 여성 유리천장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착각이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금융권 신입사원의 절반 이상이 여성임에도, 임원 승진 단계에서는 단 8%만이 그 자리에 오른다. “파이프라인 어딘가에서 여성 인력이 새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지적이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안이한 태도다. 여성 인재들이 경력 중간에서 이탈하고, 경영진은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여성 승진을 미루는 구조적 결함이 반복된다. 김 회장은 “실제로는 경력 단계마다 인재들이 조직을 떠나는 ‘파이프라인 누수’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면서 “이 과정에서 금융권은 유능한 인적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다양성과 경쟁력 확보의 기회를 잃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국내 주요 금융지주 임원 가운데 여성 비율은 여전히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사외이사를 제외하면, 의사결정의 핵심에 들어선 여성은 손에 꼽을 정도다. 최근 여금넷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여성 임원 승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 △핵심 보직 기회 부족 △직무 고착화가 꼽혔다.

그는 “여성은 이미 현장에 충분하다. 문제는 일정 위치를 넘어서면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다는 것”이라며 “이는 금융산업 전체의 혁신을 갉아먹는 심각한 손실”이라고 진단했다.

김 회장은 영국 재무부가 주도한 ‘여성 금융인 헌장(Women in Finance Charter)’을 사례로 들었다. 영국은 이를 통해 회사별 여성 임원 목표치를 공개하고, 달성하지 못하면 사유를 설명하도록 했다. 현재 400여 개 기관이 참여해 여성 임원 비율 40%를 달성했다.

최근 글로벌 금융 감독이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을 핵심 의제로 삼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문화 자본이 풍부한 조직은 직원이 스스로 법과 윤리를 지키고 장기적 신뢰를 중시한다”면서 “반대로 문화 자본이 부족한 조직은 위기와 불법에 취약하다”고 제언했다.

다양성 통해 '기업 경쟁력' 높여야

금융권이 단순히 ‘여성 인재 양성’ 차원을 넘어, 다양성을 통해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김 회장은 “여성 리더십 확대는 도덕적 요구가 아니라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이라며 “여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재들이 함께 어우러질 때 조직의 역동성이 살아난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차세대 여성 리더들에게 ‘끈기’와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여성 리더에게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되는 현실에서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걸어야 한다”면서 “동시에 타인과 협력하고 소통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갖춘다면 더 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실패는 끝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라며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기회가 오면 주저 말고 잡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차세대 여성 리더들에게 제도적 환경과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회장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멘토링과 롤모델, 정책적 지원이 결합될 때 여성 리더들이 더 많은 무대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를 북돋아 주는 연대의식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일·가정 양립 문제를 언급했다. 김 회장은 “나 또한 완벽하게 해낸 적은 없다”면서 “죄책감에 얽매이지 않고 그 순간 최선을 다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가족과 동료의 지지를 구하고, 스스로도 도움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격려했다.

※본 기획 시리즈는 ‘한국여성경제인협회’ㆍ‘여성금융네트워크’와 함께합니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쯔양·닥터프렌즈·닥터딩요와 함께하는 국내 최초 계란 축제 '에그테크코리아 2025' 개최
  • 달러가 움직이면 닭이 화내는 이유?…계란값이 알려준 진실 [에그리씽]
  • 정국ㆍ윈터, 열애설 정황 급속 확산 중⋯소속사는 '침묵'
  • ‘위례선 트램’ 개통 예정에 분양 시장 ‘들썩’...신규 철도 수혜지 어디?
  • 이재명 대통령 직무 긍정평가 62%…취임 6개월 차 역대 세 번째[한국갤럽]
  • 겨울 연금송 올해도…첫눈·크리스마스니까·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해시태그]
  • 대통령실 "정부·ARM MOU 체결…반도체 설계 인력 1400명 양성" [종합]
  • ‘불수능’서 만점 받은 왕정건 군 “요령 없이 매일 공부했어요”
  • 오늘의 상승종목

  • 12.05 장종료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136,151,000
    • -1.87%
    • 이더리움
    • 4,687,000
    • -1.31%
    • 비트코인 캐시
    • 847,500
    • -1.8%
    • 리플
    • 3,083
    • -4.25%
    • 솔라나
    • 205,300
    • -3.89%
    • 에이다
    • 644
    • -3.01%
    • 트론
    • 426
    • +2.4%
    • 스텔라루멘
    • 374
    • -1.06%
    • 비트코인에스브이
    • 30,740
    • -1.38%
    • 체인링크
    • 21,020
    • -2.78%
    • 샌드박스
    • 218
    • -4.39%
* 24시간 변동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