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EU, 유연한 규제로 금융 혁신 가속
선진국은 규제 풀고 성장 동력 확보

정권이 바뀔 때 마다 ‘포용금융’ 압박이 반복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금융회사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덩어리 규제다. 신사업을 추진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워낙 많다 보니 이자이익 중심의 수익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손발을 다 묶어놓은 채 달리기를 하라는 것과 같다는 게 업계의 불만이다.
은행권을 둘러싼 혹독한 규제 환경은 국가 경제에도 커다란 부담을 주고 있다. 은행권을 둘러싼 혹독한 규제 환경은 국가 경제에도 커다란 부담을 주고 있다. 대출 중심의 영업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은행권이 담보 상품에 치중할 수밖에 없어서다.
6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금융기관의 부동산 부문 신용공급 규모는 1932조5000억 원으로 2014년 이후 연평균 100조5000억 원 증가했다. 이는 부동산담보대출의 위험이 낮게 평가돼 자기자본비율(BIS) 관리에 유리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금융자산이 부동산 중심으로 쏠리고 자금공급이 담보 기반에 머물면서 가계부채도 빠르게 누적되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가계신용은 2023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93.6%에 달해 일본(50.7%), 독일(54.3%) 등 주요국보다 높은 수준이다. 총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비율은 11.6%로 미국(8.2%), 영국(9.0%), 일본(7.7%)보다 높다. 우리나라 가계의 채무 부담이 그만큼 과도하다는 뜻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이 담보 대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들여다봐야 한다"며 "각종 규제가 신사업을 가로막는 상황에서 이자장사를 비판하는 것은 모순이다"고 말했다.
정부의 '생산적 금융' 확대도 규제 개선이 필수적이다. 금융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국내 금융산업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외형은 성장했지만 실질 경쟁력은 제자리라고 분석했다. 국내 기업 자금조달의 약 78%가 은행 대출에 집중돼 있는 반면 자본시장 활용도는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담보 기반의 여신 위주 구조로 인해 혁신기업이나 미래 수익 기반 신산업에 대한 자금공급은 구조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금융권의 미래 성장동력인 디지털 전환도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망분리 규제’다. 국내 금융사는 보안을 이유로 내부망과 외부망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 이로 인해 인공지능(AI)·클라우드 기반 시스템 도입이 어렵고 외부 데이터 연계에도 한계가 있다. 디지털 금융 확산을 위한 기술 도입이 지연되고 있는 결정적인 배경이다.
서지용 상명대 교수는 “자산관리, 투자중개, 신탁, 핀테크 제휴 등 신사업 추진에 제약이 되는 불합리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며 “업권 간 칸막이를 낮추고 샌드박스 제도 등 유연한 규제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반대로 해외 선진국들은 규제 완화를 통해 금융사의 디지털 경쟁력 확보를 지원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위험 수준에 따라 규제를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미국은 연방 금융당국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논리적 망분리, 보안 소프트웨어 통제 등 다양한 대체 방식을 허용한다. EU도 유럽네트워크정보보안청(ENISA) 기준을 바탕으로 기관이 자율적으로 정보보안 체계를 설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유연한 보안 규제가 디지털 금융 및 핀테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기반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규제는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미국은 ‘프로젝트 2025’를 통해 소비자금융보호국(CFPB) 해체, 공모제도 예외 확대 등 금융 규제 재설계를 추진 중이다. 규제를 간소화해 기업과 가계의 자금조달·투자가 원활해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다. EU도 ‘드라기 보고서’를 기반으로 자본시장 규제 간소화, 유동화시장 활성화, 가계 저축의 생산적 투자 전환 등을 주요 정책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한국 금융산업은 여전히 이자수익 중심의 틀에 갇혀 있다”며 “자산관리, 보험, 플랫폼 기반 수수료 등 비이자 수익원을 키우기 위해 신사업 진출 규제 완화와 디지털 금융 플랫폼 육성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