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망 사용료 철회 결론 압축…한미 협상서 한국 '압박 카드' 될 수도

‘플랫폼 독점 규제’와 ‘망 사용료 제도화’는 디지털 시대의 공정질서를 세우기 위한 이재명 정부의 과제였지만 관세 협상 테이블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미국이 유럽연합(EU)과의 관세 협상에서 ‘망 사용료’ 문제를 향후 거론하지 않기로 합의하면서 한국도 관세 부담을 피하고자 디지털 규제 전반을 사실상 양보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처럼 통상 협상이 디지털 정책의 방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 정부가 디지털 산업 전략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추진하기 어려운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로 인해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의 경쟁력 약화는 물론,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과 국민 편익 침해 등 산업 전반에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백악관은 28일(현지시간) “미국과 EU는 부당한 디지털 무역장벽을 해소하고자 한다”며 “EU는 망 사용료를 도입하거나 유지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EU 측은 관련 규제를 철회한 바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미국은 협상 결과를 자국에 유리하게 해석하며 EU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 정부에서 온라인플랫폼공정화법(온플법), 고정밀지도 반출 제한, 외국 클라우드 서비스 이용 제한(CSAP)과 더불어 망 사용료 문제를 한국의 대표적 '디지털 교역 장벽'으로 지목해 온 만큼 미국 측이 이 문제를 한층 강하게 압박할 가능성이 주목된다. 미국의 상호 관세 협상 마감 시한이 사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한국과의 협상에서도 망 이용대가 의무화 법안 제정 철회 등 유사한 수준의 양보를 요구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업계에선 인공지능(AI) 서비스 확산으로 인해 트래픽이 일반 검색 대비 10배 이상 폭증하는 상황에서 망 투자 부담을 글로벌 콘텐츠 기업이 분담하지 않는 구조가 더욱 고착화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한 통신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 망 사용료를 내지 않는 구글의 트래픽 점유율이 30%가 넘는데 미국 정부를 등에 업은 빅테크가 망 사용료를 내지 않을 명분만 더 커진 상황”이라며 “AI의 확산으로 트래픽 폭증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사업자와 통신사업자의 부담만 커지고 결국은 네트워크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위축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망 이용대가 의무화가 한미 통상 협상에서 쟁점으로 떠오른 것과 관련 신민수 한양대 교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국내외 사업자 간의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망 이용 대가는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만큼 국내외 사업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제도이기 때문에 차별로 볼 수 없다”며 동등하게 적용되는 법안인 만큼 FTA 위반이나 통상 마찰로 이어질 사안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 이용대가 제도화와 온플법 등 이재명 정부에서 제도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법안들이 통상 마찰 우려로 동력을 잃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망 사용료나 온플법, 지도 반출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라며 “최근에는 미국의 AI 모델을 쓰도록 압박하는 AI액션 플랜까지 내세우며 AI 정책과 산업 생태계 전반에 대한 간접적인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공지능·소프트웨어산업협회(KOSA)는 ‘미국 AI 행동 계획에 따른 우리나라 영향’ 검토 보고서를 통해 “핵심 AI 모델과 플랫폼이 미국 중심으로 구축되면 한국의 기업들은 앱을 개발해 플랫폼에 전달하는 하위 공급자 역할에 머물 수 있다”고 진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