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는 수십 년간 진위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작품이다. 생전 천 화백은 “내 자식도 몰라보겠는가”라는 말로 ‘미인도’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단언했지만, 국립현대미술관과 검찰은 이를 진품으로 판단하며 논란은 계속됐다.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행정11-3부(김우수 최수환 윤종구 부장판사)는 최근 천 화백의 차녀인 김정희 미국 몽고메리대 미술과 교수가 중앙지검장을 상대로 낸 정보공개거부 처분 취소 소송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앞서 검찰이 미인도를 진품이라고 판단한 데 반발한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요구한 손해배상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검찰의 수사기록 중 9명의 감정인이 작성한 감정서 정보는 공개하라는 판단이 나온 것이다.
유족이 정보공개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검찰은 2016년 수사 결과 발표 당시 “진품 의견이 우세하다”고 밝혔으나, 나중에 확인된 실제 감정 결과는 감정인 9명 중 진품 의견이 4명, 위작 3명, 판단 불가가 2명이었다.
진품이라는 의견은 전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검찰이 다수 의견인 것처럼 발표했기 때문에 감정인들의 정확한 감정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는 취지다.
또 일부 감정인은 법정에서 “검사들이 진품 결론을 내리려는 뉘앙스를 풍겼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감정이 이뤄졌다”고 증언했는데, 이러한 정황이 감정 과정을 왜곡했고 검찰이 중립적 수사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게 유족 측 판단이다.
감정서 공개를 찬성하는 쪽은 감정 과정의 투명성 확보를 강조한다. 감정서 내용은 단순한 개인적 의견이 아니라, 국가기관이 최종적으로 ‘진품’ 판단을 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공적 정보라는 논리다.
헌법 제21조는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있으며,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도 국민이 국가기관의 결정 과정에 접근할 수 있도록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감정서가 검찰 수사 결과의 근거 자료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국민이 그 내용을 열람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반면 검찰은 감정서 공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감정인은 법적 책임을 지는 결정권자가 아니라, 수사기관의 요청에 따라 감정 의견을 제시한 협조자에 불과하므로 개별 감정 내용까지 공개돼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감정서는 수사기록 일부로써 수사의 내밀한 요소에 해당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비공개 대상이라고 보고 있다.
감정인의 실명이 노출되거나 특정 감정 의견이 공격받을 경우, 전문가가 과도한 사회적 책임을 떠안게 된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처럼 양측의 주장은 감정 내용이 공공의 알 권리와 투명성 확보를 위한 공개 대상인지, 아니면 수사기관의 판단을 돕기 위한 비공개적 참고 자료인지에 대한 근본적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
허윤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검찰의 수사권 행사에 대한 투명성과 국가기관의 설명 책임을 요구하는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면서도 “감정인의 직업적 안전과 표현의 자유도 함께 보장돼야 하므로, 공개의 범위와 절차에 대한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움]
허윤 변호사는 법무법인 동인 문화예술팀 아트앤로(Art&Law) 소속으로, 서울예술재단 고문, 현대미술관의 해외 작가 작품 전시 자문, 해외 유명미술관의 국내 분관 건립 자문, 갤러리의 위탁 작품 소유권 분쟁 및 위작 판매 분쟁 자문 등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