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에세이] 망한 RPG 돼가는 한국 사회, 카르텔을 깨야

입력 2023-12-1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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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과 홍석철 저출산고령사회의원회 상임위원 등이 10월 3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인구정책기획단 회의에서 주요 과제를 논의하고 있다. (뉴시스)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과 홍석철 저출산고령사회의원회 상임위원 등이 10월 3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인구정책기획단 회의에서 주요 과제를 논의하고 있다. (뉴시스)

고전 역할수행게임(Role Playing Game, RPG)의 흥망은 대체로 비슷하다.

서버 오픈 초기에는 접속 장애가 발생할 정도로 많은 이용자가 몰린다. 이땐 모든 이용자가 평등하다. 각자가 가진 건 처음 게임에 접속했을 때 받은 기본 장비뿐이다.

이용자들은 캐릭터가 일정 레벨에 도달할 때까지 초식동물 등 저레벨 몹(mob)을 주로 사냥한다. 이후 상위 사냥터로 향한다. 상위 사냥터는 경험치 효율이 높고 재화 획득량이 많은 대신 단독사냥이 어렵다. 이에 이용자들은 파티(Party)를 결성해 집단사냥한다. 이 과정에서 친분이 쌓인 이용자들은 문파·길드(guild) 같은 소집단을 만든다. 초기 문파·길드는 레벨·장비 진입장벽이 낮고, 신규 이용자 적응과 캐릭터 성장을 돕는 순기능이 크다.

캐릭터가 일정 레벨을 넘어서면 경험치 측면에서 사냥 효율이 극단적으로 떨어진다.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한다. 고레벨 이용자들은 성장에서 장사로 눈을 돌린다. 이들은 문파·길드 단위로 고성능 장비 획득률이 높은 사냥터를 독식하고, 공급을 제한해 게임 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 부를 축적하기 어려워진 다른 이용자들은 사냥터를 독식한 이들로부터 현실의 돈으로 게임 내 재화를 산다. 게임과 현실 간 세계관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캐릭터 레벨, 장비, 능력치 등 겉으로 보이는 스펙에선 판매자들과 구매자들 간 큰 차이가 없어진다. 자급자족 이용자들은 사냥으로 장비를 얻기도, 사냥으로 얻은 재화로 장비를 구매하기도 어려워진다.

또 다른 문제는 ‘기본’의 상향 평준화다. 사냥터를 독식한 이들과 현실의 돈으로 게임 내 재화를 산 이들은 저마다 카르텔(독일어 Kartell)을 만든다. 전자의 카르텔은 폐쇄성이 강하다. 문파·길드 가입은 인맥을 통해서만, 사냥 파티 모집은 문파·길드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뤄진다. 후자의 카르텔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다. 대신 문파원이나 사냥터 파티원을 모집할 때 레벨·장비, 전투력 등에 최소기준을 두고, 이 기준에 못 미치는 이용자들을 배제한다. 본인이 캐릭터에 현금을 투자한 데 대한 보상심리 때문일 수도,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특정 이용자들의 사냥터 독점·독식이 문파·파티 가입을 위한 최소기준 형성, 게임 내 계급사회 형성으로까지 이어지면 그 게임은 ‘흥’에서 ‘망’으로 전환된다. 신규 이용자 유입이 끊기고, 기존 이용자는 이탈한다. 계급 피라미드에서 최하단이 사라지면 무리해 최소기준을 맞춘 이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결국, 남아있던 고인 물도 서서히 게임을 떠난다.

RPG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현실에서도 확고하고 폐쇄적인 주류세력이 존재하고, 주류세력의 외형을 따라한 이들이 준주류세력을 만든다. 준주류세력으로, 또는 이들과 동급으로 대접받기 위한 기준은 다양하다. 특정 직업이 되기도, 학벌이 되기도, 주거형태가 되기도, 자동차 브랜드가 되기도, 의류·가방 브랜드가 되기도, 학군이 되기도, 자산가액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발달로 다양한 영역에서 최소 조건이 높아지고 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조건을 맞추려 무리하게 명품·여행에 소비하거나 주식·코인·주택에 투자한 이들의 상당수는 빚더미에 허덕이고 있고, 상경한 지방 청년들은 주거비·생활비 부담에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갖춘 조건에 못 미치는 이들을 배제하고, 차별한다.

저출산 문제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을 거다. 보건복지부가 7일 개최한 무자녀 부부 간담회에서도 입시 전쟁, 비교 문화에 따른 최소조건 상향으로 자녀를 포기했다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 사회를 고전 RPG로 본다면, 현시점은 쇠락기의 초입이다. 출생아는 줄고,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은 늘고 있다.

수십 년간 지속한 문제를 일순간에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해결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미디어, 캠페인 등으로 다양한 삶의 형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드는 게 첫째다. 장기적으론 사회 곳곳의 카르텔을 깨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를 망한 RPG로 만들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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