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38. ‘이-팔 전쟁’에 분열하는 유럽

입력 2023-11-0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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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팔레스타인 최대 원조공여국
회원국 국익따라 목소리 ‘제각각’

‘50년 전 일이 그대로 반복되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1973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주축으로 한 아랍국가들은 6년 전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공격했다. 당시 유럽경제공동체 회원국들은 이 전쟁에서 친이스라엘파와 반이스라엘파로 나뉘어 분열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유럽의 분열을 조장하려 했고 원유 생산을 감축했다. 이 때문에 그 해 말 유가는 전쟁 전과 비교해 평균 4배 넘게 폭등했다. ‘석유파동’이 시작됐고 경기침체 속에 물가가 급등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유럽과 세계를 휩쓸었다. 지난달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전격 침략하면서 중동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유럽경제공동체(EEC)에서 유럽연합(EU)으로 탈바꿈한 ‘유럽’은 이 전쟁 대응에서도 여전히 분열 중이다.

‘인도주의적 잠정휴전’ 대 ‘전면휴전’

“가자지구에서의 민간인 원조를 허용할 인도주의적 회랑과 일시적 전투 중지를 요구한다.” 지난달 26일 브뤼셀에서 열린 EU 27개 회원국 수반들의 모임인 유럽이사회 성명서다.

EU 회원국들은 이 문구에 합의하느라 5일 넘게 논쟁을 벌였다. 스페인과 벨기에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요구한 정도의 즉각적인 휴전을 성명서에 담아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반면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체코는 이런 휴전이 현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있어 하마스에게 유리하다며 이스라엘이 테러단체 하마스에 대해 행사하는 자위권을 제한해서는 안된다고 맞섰다. 결국 최종 성명서는 일시적인 전투중지로 합의됐다. 이번 성명서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대응을 두고 그간 드러난 EU 분열을 잠시 봉합하는 듯했다.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전격 침공한 날 행정부 역할을 하는 EU 집행위원회는 팔레스타인 지원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EU와 27개 회원국은 팔레스타인의 최대 원조공여국으로 올해 6억9100만 유로를 지원한다. EU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공무원의 월급과 병원 운영 등을 지원해왔다. 3일 후 EU 외무장관들은 긴급회의를 갖고 팔레스타인 지원을 중단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회의를 주재했던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계속 지원한다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인정하지만 국제법을 준수하라고 촉구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전기와 물, 식량 제공을 중단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이처럼 집행위원회와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 간의 정책 차이는 EU 집행위원회가 회원국과 충분한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원 중단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민간인 피해가 극심한 가운데 EU 27개국 정상들이 지난달 2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정상회의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민간인 피해가 극심한 가운데 EU 27개국 정상들이 지난달 2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정상회의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EU 분열, 우크라이나 때보다 심해

분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3일 이스라엘을 방문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하마스의 끔찍한 테러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 국민과 연대함을 표현하려 방문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집행위원장이 이스라엘과의 연대를 강조했을 뿐, 국제법 위반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

더구나 EU의 외교안보 정책은 보렐 고위대표가 총괄한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 EU 회원국들은 집행위원장의 발언이 EU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누누이 강조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테러에 대항해 자위권을 최대한 행사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국제법을 지키는 한도 안에서 행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스라엘의 맹방인 미국조차 이스라엘에 자제를 촉구했음을 감안할 때,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발언은 균형감각이 떨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독일인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적 부채 의식을 지니고 있어 이렇게 행동했다고 추정된다.

EU 회원국들은 국익에 따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상이한 정책을 실행해왔다. 1999년부터 EU는 외교안보 이슈에서 단일한 목소리를 내고 단일한 정책을 실시하려고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를 임명해 운영해왔다. 그러나 외교안보 문제는 여전히 회원국들의 만장일치가 필요하다. 한 회원국 안에서도 여당과 야당이 국제분쟁에 대해 다른 입장을 보일 수 있는데, 하물며 27개 회원국 안에서의 상이한 목소리와 정책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럼에도 이번 전쟁에서 EU의 분열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단일대오와 크게 대비된다. 지난해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침공한 후 EU는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더 이상 수입하지 않고,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부과했다. 또 EU 역사상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해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다른 EU 회원국의 침략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러시아 앞에서 회원국들은 단결할 수밖에 없다. EU는 이 전쟁을 계기로 지정학적 행위자로 부상했다고 자평했다. 반면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EU에게 피란민의 대거 입국 등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이다.

EU, 지정학적 행위자 한계 드러내

1973년 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이스라엘을 전폭 지지하며 ‘유럽’에게도 동참을 촉구했다. 당시 미 공화당 닉슨 대통령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일하던 헨리 키신저는 ‘유럽’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도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냐며 ‘유럽’의 담당자 전화번호가 없다고 한탄했다.

EU가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를 임명하고 공동외교안보정책을 운영해온 지 25년이 지나간다. 이제 키신저의 후임자들은 언제든지 EU의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와 협의할 수 있고 그렇게 해왔다. 그렇지만 회원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외교안보정책에서 EU가 공동정책을 실행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전면전을 확대할 것이기에 EU의 분열은 더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이를 둘러싼 EU의 분열과 갈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대구대 군사학과 교수·국제정치학 opinion@etoday.co.kr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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