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레이디 CFO’는 없다

입력 2016-06-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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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경 국제팀장

지난주 미국 월가를 격분케 하는 사건이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이슈 메이커인 알파벳의 첫 주주총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알파벳은 구글의 지주회사로 출범한 후 처음으로 지난 8일(현지시간) 연례 주주총회를 열었다. 문제는 정해진 순서 후 질의응답 시간에 일어났다. 한 주주가 회사 주가에 대해 언급하면서 루스 포랏 최고재무책임자(CFO)를 향해 “제 첫 질문은 ‘레이디 CFO’에게 하겠습니다(My first question is to the lady CFO)”라고 말한 것이다.

“레이디 CFO?” 장내는 잠시 술렁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은 그냥 웃어넘겼다고 한다.

‘LADY’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여자 분, 여성, 특히 나이든 사람들이 여성을 정중하게 가리킬 때 쓰는 말, 숙녀’ 등을 나타낸다.

알파벳의 주총 당시 질의응답 시간에 무대에 오른 건 에릭 슈미트 알파벳 최고경영자(CEO·남성)와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남성), 데이비드 드러먼드 알파벳 수석 부사장(남성), 포랏 CFO(여성) 네 사람이었다. 이들의 직함이 겹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포랏을 ‘레이디 CFO’라고 칭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CFO라는 직함에 ‘레이디’라는 수식어를 붙인 게, 과연 존대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까. 여자 대통령이 나오고, 기업에서 유리천장도 깨진 지 이미 오래인 시대에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은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포랏은 자신을 ‘레이디 CFO’라고 칭한 투자자의 질문에 정중하게 답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트위터를 타고 삽시간에 퍼졌고, 결국 월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월가의 한 투자회사의 중역은 “포랏은 CFO다. ‘레이디 CFO’가 아니다”라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또 한 투자자는 “그 질문은 포랏에게, 구글의 어느 주방에서 일하느냐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꼬집기도 했다.

월가가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포랏은 월가에선 남녀 사이를 불문하고 록스타에 버금가는 유명인이자 실력자이다. 그는 미국 명문인 스탠퍼드 대학을 졸업한 후 런던 정경대와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작년 5월 구글로 이적하기 전까지 모건스탠리에서 CFO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넷스케이프와 프라이스라인, 이베이, 아마존 등 굵직한 정보기술(IT) 기업의 기업공개(IPO)를 맡았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당시에는 위기에 처한 모건스탠리의 구조조정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 2기에서는 재무차관 제의도 받았으나 본인이 고사했다. 무엇보다 그가 이적한 직후, 구글은 포랏의 조직 효율화 방안에 힘입어 어닝 서프라이즈를 연출하기도 했다.

‘레이디 CFO’ 사건은 세계 금융의 중심인 월가와 IT 산업의 요람인 실리콘밸리 간의 문화 차이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능력 여하를 떠나 커튼 뒤, 조직 밖의 세상에선 여전히 ‘여자는 여자’라는 식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야후의 마리사 메이어 CEO다. 2012년 출산 후 2주 만에 회사에 복귀한 그는 작년에도 출산 후 조기에 복귀해 여성 단체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출산 휴가를 제대로 쓰지 않는 CEO의 결정이 선례로 남아 다른 직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출산 휴가까지 반납하고 경영 일선에서 고군분투한 보람도 없이 야후의 실적은 악화일로. 메이어는 현재 주주들로부터 쫓겨나기 일보 직전이다. 이런 상황에서 출산 휴가를 제대로 찾아먹었더라면 되레 더 비난을 받지 않았을까.

미국 S&P500지수 구성 기업 CEO 중 여성 비율은 5%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5%의 여성들은 자신들에게 유리천장은 없었노라고 당당하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유리천장 너머에 있는 암묵적인 차별·편견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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