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걷기의 즐거움

입력 2018-10-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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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연일 푸르고 높은 가을 하늘 아래를 걷는 일은 즐겁다. 텃밭 농사꾼은 들깨를 베어 볕에 잘 마르라고 길바닥에 널고, 고구마를 캔 밭은 땅은 새로 갈아엎고 배추를 심었다. 어느덧 숲을 채운 활엽수의 잎잎이 단풍이 들어 곱고, 숲길에는 도토리가 구르는데, 어떤 도토리는 어쩌자고 머리통에 딱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여름과 가을 사이 빛의 편차는 뚜렷하다. 저 여름의 땡볕은 광기를 품은 듯 사나웠는데 가을의 대지에 골고루 퍼지는 햇빛은 고요하고 자애롭다. 나는 바람의 서늘함 속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아, 가을이구나!’ 한다. 여름내 짐승처럼 드세던 녹색 식물이 순해지고, 울안 대추 열매에 붉은빛이 돌 무렵은 1년 중 가장 쾌적한 때다.

찾아보니, 안성에 살던 때 가을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이런 시를 써서 발표했다. “태풍 나비가 지나간 뒤 쪽빛 하늘,/그 아래/그악스럽던 푸새것들에도 누른빛이 든다./콩밭머리에 서면,/여문 봉숭아씨앗 터진 듯 뿔뿔이 흩어지는/새떼를 문득 황토 뭉개진 듯 붉은 하늘에서 놓친다./대추 열매에는 붉은빛 돋았다.//푸른 기 도는 울안 저녁빛 속에서/늙은 지구가 진절머리를 치며 몸비늘을 떨군다./쇠죽가마에 식은 찻물 괴듯/맑은 가을비 한 뼘 깊이로 투명한데,/그 위에 뜬 붉고 노란 가랑잎들……//내 몸 위일 위도(緯度)에 완연한 가을이구나!/가을은 저 몸의 안쪽으로/안착하나 보다.//오래 불 켜지 않고 앉아서/앞산 쳐다보다가/달의 조도(照度)를 조금 올리고/풀벌레의 볼륨을 한껏 높인다.//복사뼈 위 살가죽이 자꾸 마른다.”(졸시, ‘가을 법어(法語)) 다른 계절보다 가을은 나이듦의 실감이 속수무책으로 깊어진다. 나는 문득 복사뼈 위 살가죽이 마르는 것에서 내가 더는 젊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가을날 천지에 가득한 청명한 기운을 느끼려고 숲과 바람을 헤치며 걷는다. 발을 부드러운 양말로 감싸고 바닥이 단단한 운동화를 신고 집 바깥으로 나선다. 제대로 걷기 위해서라면 야생의 숲을 찾는 게 좋다. 나는 집 근처의 심학산 산길을 오르는데, 누리에 비친 환한 가을볕 아래 너른 배밭이 펼쳐진다. 배밭은 수확이 끝난 뒤라 관리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 너른 배밭을 끼고 큰 갈참나무들이 빽빽한 숲속으로 이어진 산길로 들어설 때 발은 대지를 밟고, 나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본다. 구절초 따위가 핀 가파른 산길을 걸어 올라가느라 들숨과 날숨을 내쉬는 속도가 빨라진다. 발걸음을 멈추고 심학산 중턱에서 먼 풍경을 조망한다. 가까이에는 교하(交河)의 들이 펼쳐지는데, 가을의 조락과 수확이 끝난 들은 유순한 그늘을 드리운 채 적막에 잠긴다. 더 멀리로는 한강 하류가 눈에 들어온다. 산길을 올라오느라 이마에 땀이 돋았지만 간간이 부는 바람이 이마에 돋은 땀을 씻어낸다. 산봉우리를 향해 걷던 몸은 고되어도 그 수고 속에서 깃드는 한 줄기 기쁨과 평안이 있다. 숲속 나무들은 바람을 맞으며 가지를 살랑거리고, 노랗고 붉게 물든 잎은 우수수 떨어진다. 나무들 사이를 꿰뚫고 가을 오후의 햇살이 직선으로 뻗어와 길을 비춘다.

걷기는 신체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행위가 아니라 망각된 몸을 제 자리에 되돌려주는 일이다. 우리가 걸을 때 몸은 살아나고 우리 몸의 부피와 그 실감을 살려낸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길을 돌아보라. 길이 곧 인생이 아니었던가! 누구에게나 삶이란 자기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다. 나는 항상 또렷한 목적지가 있어 길을 나선 것이 아니다. 내가 걷는 길은 자신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권태에 빠진 나 자신과 작별하고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생생한 의욕의 표출이기도 했다.

대개 철학자들과 시인들은 걷기를 좋아한다. 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물론이거니와 이마누엘 칸트도,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아르튀르 랭보도 다 걷기를 좋아했다. 철학자 니체 역시 평생 걷기를 사랑했다. 아마 니체보다 더 걷는 걸 좋아한 사람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는 호숫가와 바닷가를 끼고 펼쳐진 길을 걷고, 높은 산과 언덕을 찾아 오르며 걸었다. 그는 평지보다는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나는 고산지대를 걷는 걸 선호했다. 그에게 걷는 것은 상승하는 것, 몸과 기분이 다 함께 춤추듯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뜻했다.

니체는 저 유명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발꿈치는 일어서고, 나의 발가락들은 내 의중을 헤아리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 춤추는 자는 귀를 발가락에 달고 있는 법이니!” 니체의 걸음걸이는 가볍고 춤추는 듯했다. 발바닥은 땅에 입 맞추고, 발가락들은 땅에서 울려 나오는 심연의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니체의 철학은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험한 바위와 빙하에 맞서며 걸을 때 떠올랐던 사유를 바탕으로 빚어졌다. 그의 철학이나 사상은 꽉 막힌 서재나 도서관에 틀어박혀 수백 권의 책을 파고든 다음 인용문으로 포식하고 주석을 과식해서 억지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니체는 오직 서재나 도서관같이 폐쇄된 공간 안에서 억지로 조합한 책들을 믿지 않았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한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오, 한 인간이 어떻게 그 사상에 도달했는가를, 그가 잉크병을 앞에 두고 뱃살을 접은 채, 종이 위로 머리를 구부리고 앉아서 그 사상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를 우리는 얼마나 빨리 알아채는가! 오, 우리는 얼마나 빨리 이런 책을 읽어치우는가! 내기를 해도 좋다. 눌린 창자가 스스로를 폭로하며, 또한 서재의 공기와 천장, 좁은 서재가 스스로를 폭로한다.” 니체는 기막히게도 좁은 서재의 탁한 공기 속에서 뱃살을 접고 머리를 종이 위에 박은 채 남의 책들을 허겁지겁 탐식하며 써낸 ‘가짜 사상’들을 믿지 않았다. 그의 ‘영겁회귀’의 철학도 걷는 도중에 떠오른 착상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했다.

걷는 자들은 기필코 집 바깥으로 나서야 한다. 걷기란 바깥에서 바람을 맞고 햇볕을 쬐며 광합성을 하는 일이니까. 울퉁불퉁한 지형을 건너고 야산과 언덕들을 가로지를 때 꽉 막힌 내면에 변화를 주고 기분을 좋아지게 할 수 있다. 걷는 자는 풍경과 마주한다. 풍경은 굽이치며 흐르는 물길과 높고 낮은 구릉 따위의 물질적 지형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풍경은 땅의 높고 낮음을 포함해서 차라리 태양과 바람, 빛과 공기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다. 풍경이 멀고 가까운 공간의 중첩이라면 걷는 자는 그것 속으로 덧없이 들어선 틈입자이고, 빛과 공기가 빚은 풍경을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따위의 전신 감각을 써서 흡입하는 자일 테다. 발과 다리를 써서 걷는 자들은 풍경을 관조한다. 탁 트인 시야로 풍경이 들어올 때 그는 관조 속에서 제 몸과 풍경을 뒤섞는다.

걷기는 몸을 쓰는 일이라 고되지만 보상이 따른다. 걷는 동안 눌리고 접힌 몸의 근육과 관절들이 펴지고, 돌연 육체의 유연성 속에서 기분은 전환하며 상승한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에서 이렇게 썼다. “걷는 육체는 마치 활처럼 펴진다. 햇빛을 받은 꽃처럼 넓은 공간을 향해 열리는 것이다. 상체는 노출되고, 두 다리는 펴지며, 두 팔은 들어 올려진다.” 걷는 자는 불안과 공허를 떨치고, 비열함과 악덕과 탐욕에서 벗어난다. 그는 오직 몸의 필요와 날숨과 들숨에, 몸의 헐떡거림에 집중한다. 그는 점점 더 정신과 사유에 집중하는데, 이때 존재의 즐거움으로 충만해진다. 한참 걷다 보면 홀연한 지각(知覺)의 열림의 순간이 다가온다. 풍경 속을 걷는 자는 풍경을 밀고 앞으로 나가는 동안 그것과 함께 움직이며 공명한다. 마침내 그 자신이 풍경이 되고 말 테다. 몸이 더 활기차고 즐거워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가을에 바깥으로 나가서 힘차게 걸어보자.

시인·인문학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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