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 개공파(開恐派)의 고백

입력 2018-09-0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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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어언 20년이 넘는 중년의 제자 말로는 “학교 근처만 와도 이상하리만치 힐링이 되는 기분”이란다. 아마도 이십대 초반 풋풋했던 시절의 모습이 떠올라 그럴 수 있겠거니 싶다. 나도 가끔 교정을 거닐 때면 그 시절 귓가를 스치던 바람결이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한데 요즘 들어 부쩍 ‘개공파(개강을 공포스러워하는 교수 모임)’의 일원이 되면서 하소연도 늘고 있다. 공포라는 표현이 다소 과하긴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개강이 두려운 건 학생들과의 거리감이 그만큼 커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올해로 교단에 선 지, 시간강사 시절까지 합산하면 27년째. 예나 지금이나 내게 강의실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나의 삶과 20대 초반 삶의 만남과 소통이란 의미도 적지 않건만, 소박한 바람과 엄연한 현실 사이에 괴리가 커져만 간다.

어느 날인가 강의동 앞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한 학생이 “어머, 인행사 간다”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인행사’는 나를 부르는 호칭이었는데, 담당하고 있던 ‘인간행위와 사회구조’를 줄여서 그리 부르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국사 (담당 선생님) 간다”, “영어 간다”는 표현이 입에 익어 대학에 와서도 그리한다는 것이다. 하기야, ‘저기요’, ‘여보세요’ 라는 호칭도 들어보았다는 동료들이 있으니 ‘인행사’ 정도는 애교로 봐 줄 만도 하겠다.

강의실에서 경험하는 세대차 또한 만만치 않다. “저 어린 시절엔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 자리에서 출발하는 전차(電車)가 있었답니다. 전차 타고 화신백하점 지나 종로로 심부름을 다니곤 했지요.” 인행사 시간에 도시의 발달 과정을 설명하면서 예전의 서울 거리를 떠올리다 보면 영락없이 “교수님은 영화 ‘장군의 아들’ 시대에 사셨나요?” 라는 질문이 들어온다.

한 번은 다문화 포용력을 측정하는 ‘보가드 스케일’을 설명하면서 험프리 보가드의 보가드를 연상하면 된다고 말해주었건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내가 더 당황했던 적도 있었다. 험프리 보가드가 도대체 누군지도 모르는 학생들 앞에서 영화 카사블랑카 속 남자 주인공의 치명적 매력을 떠올려 보라 했으니, 나의 주문이 얼마나 뜬금없었을까.

최근 직장 내 신세대 조사 결과를 보며 슬그머니 웃은 적도 있다. 직장 상사가 “알아서 해”라고 지시할 경우 신세대 사원들은 “업무의 자율권을 부여받았다”거나 “상사가 나를 인정하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비율은 4명 중 1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3명은 “불명확한 업무 지시다”, “성의없이 업무를 부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 학생들은 학기말 리포트 주제를 주고 마감일만 지정해주면 대체로 ‘알아서’ 과제를 제출했건만, 요즘 학생들은 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해주길 원한다. 드디어 지난 학기엔 “과제 제출 시 글자 크기, 줄 간격, 여백 주기도 지정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으니 말해 무엇하리오.

학생들과의 세대 격차야 애교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가능하다면 유연하게 적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시대라는데,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한다는데, 암기력보다는 다른 많은 역량들이 절실히 요구된다는데, 아직도 ‘교수의 농담까지 받아 적는 학생에게 A+를 주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서는 것 또한 숨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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