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우레비, 너 누구냐?

입력 2018-09-0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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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교열팀장

지난 주말 내가 사는 아파트 놀이터를 지나다가 커다란 소쿠리에 널린 붉은 빛의 고추를 보았다. ‘아니 벌써….’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니 대추나무에도 감나무에도 푸른 열매들이 흐벅지다. 기나긴 여름 끝에 만난 가을이라 그런가 더더욱 반가웠다.

장석주 시인의 시 ‘대추 한 알’이 떠올랐다. “제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천둥 몇 개, 벼락 몇 개/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가을의 완숙함을 노래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도 웅얼거렸다.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주시어/그 열매들이 익도록 서둘러 재촉해 주시며/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가을은 거친 몸짓으로 대추를 붉게 물들이고, 따뜻한 입김으로 포도주에 달콤함을 불어넣을 것이다.

그런데 우레비 때문에 걱정이다. 지구온난화 탓인지 요즘 들어 우레비가 부쩍 잦다. 우레는 천둥의 순우리말로, 우레비는 말 그대로 천둥이 치면서 내리는 비이다. 가루처럼 뿌옇게 내리는 가루비, 실처럼 가는 실비, 가랑비 등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거칠다.

‘우레라고? 우뢰가 바른 말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이가 많겠다. 우레의 이전 표준어가 ‘우뢰’이니 그럴 만도 하다. 우레는 우레→우뢰→우레 순으로 표준어가 바뀌었다. 우레는 동사 ‘울다(鳴)’의 어간 ‘울-’에 명사를 만드는 접사 ‘-게’가 붙은 형태이다. 그런데 ‘울게’의 ‘ㄱ’이 ‘ㄹ’의 영향을 받아 ‘ㅇ’으로 약화돼 ‘울에’로 변했고, ‘울에’를 연철한‘우레’가 표준어에 올랐다.

이후 조선어학회가 펴낸 ‘조선어표준말모음’에서는 ‘우뢰’가 표준어 대접을 받았는데, 순우리말 ‘우레’를 한자 ‘비 우(雨)’와 ‘번개 뢰(雷)’가 합해진 ‘우뢰’로 오해한 탓이다. 하지만 ‘우뢰’의 표준어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우레가 ‘울다’에서 파생된 명사임이 밝혀지면서 1989년 ‘우레’가 다시 표준어로 인정받았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우뢰’가 문화어(우리의 ‘표준어’에 해당)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은 우레가 치는 것을 ‘우뢰질하다’, 많은 사람이 치는 큰 소리의 박수는 ‘우뢰 같은 박수 소리’라고 표현한다. 남북 간 언어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이다.

‘우레’만큼이나 잘못된 말이 널리 쓰이는 예로 ‘악천후’를 빼놓을 수가 없다. ‘악천후’를 ‘비 우(雨)’가 들어간 ‘악천우’로 알고 쓰는 이들이 많아서이다. 악천후는 비뿐만이 아니라 눈이 올 수도, 우박이 내릴 수도, 바람이 매섭게 불 수도 있다. 한마디로 몹시 요란하고 나쁜 날씨를 표현한 말이다. 나쁘다는 뜻의 ‘악(惡)’ 자와 날씨를 의미하는 ‘천후(天候)’가 결합했다. 어려운 한자어 ‘악천후’보다 ‘거친 날씨’로 표현하는 게 좋겠다.

가을이 바삐 움직인다. 강렬한 태양으로, 매서운 폭우로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천둥·번개 쇼’는 기본이다. 옛사람들은 가을에 내리는 비는 양이 적어 “가을비는 빗자루로도 피한다”, “가을비는 장인 구레나룻 밑에서도 피한다”고 했건만 올가을엔 내렸다 하면 극악스럽게도 쏟아붓는다. 제발 대추의 볼이 발그레해질 때까지만 태풍이 천둥이 벼락이 머물다 떠났으면 한다. 맑고 푸르른 햇볕에 포도주도 달게 익어야 하니까. 그래야 황금들녘이 수확의 보람으로 가득 차 농부들이 활짝 웃을 수 있다.jsjy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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