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글쓰기의 만상(萬想)

입력 2017-10-3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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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 전엔 주제를 잡아야 하는데, 이게 영 쉽지 않다. 현실과 동떨어져서도 안 되고, 알맹이 없이 그럴싸한 미사여구만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도입부는 괜찮다 싶다가도 전개의 벽에 부딪칠라치면 다시금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솔직함’이야말로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가장 효율적임은 알지만 그 ‘솔직함’이라는 것이 어디 말처럼 그리 쉽던가! 이렇듯 사뭇 글 쓰는 것을 즐기는 누구라도,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한 달을 주기(週期)로 돌아오는 칼럼의 주제를 무엇으로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필자의 태도에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토로하고자 한다.

제멋에 쓰는 어쭙잖은 글이지만 대학 시절 내겐 글쓰기의 적수(敵手)가 있었다. 지금은 광고감독으로 제법 알려진 ‘J’는 그 시절 ‘편안한’ 문체로 논단, 리포트 등 그 어떤 형태의 글이든 펜을 잡으면 그야말로 ‘술술’ 써 내려갔다. 내가 보기엔 ‘술술’의 시간만큼이나 객관적인 시각(視角)이 턱없이 부족해 보였으며, 뜬구름 잡는 듯 희미한 논조라도 발견할라치면 ‘J’의 글쓰기에 대해 깊이 없음을 운운하곤 했었다.

그럼에도 J의 글은 복잡하리만큼 꼬인 정치적 이슈에 대한 대자보(大字報)나 경제적 해석이 필요한 논단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쉽게’ 읽혔다. 수더분한 글쓰기의 폄하는 나의 어려운 글쓰기가 마치 지성인의 성찰인 양 그렇게 합리화되어 왔으며, 그 무게감에 나는 지금도 주제 선정 단계부터 이리 힘들어하고 있다.

적어도 칼럼이라는 것이 남에게 읽히기 위함이기에 나를 과하게 포장하기도 하지만 포장된 글귀로 인해 본연의 생명력조차 없어짐을 알아차리고 난 뒤에는 포장보다는 ‘되돌아 봄’의 계기가 찾아오더라. 참으로 신기하다. 교감은 만인에게 느껴진다. 나만이 아는 글의 깊이를 남들의 시선에서 캐치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솔직함’의 부재 속에서는 결코 쉽게 읽히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리하면 ‘죽은’ 글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고민의 깊이만큼 글은 쉬워지고, 생각의 시간만큼 글쓰기는 빨라지는 것일까? 아직은 ‘솔직함’의 세계에 입문(入門)조차 하지 못한 글쓰기 초보자의 스물여섯 번째 글은 다시금 2년 전 초짜로 되돌아가야 할 판이다. 반면 J는 지금도 어디선가 ‘쉬운’ 스토리보드를 그리고 있을 시점에 말이다. 그의 글쓰기가 옳았다.

한글맞춤법 하나 제대로 지키지 않은 어느 노모의 손편지가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솔직함과 순수함이 글쓰기의 시작임을 말해준다. 쉬운 글이라고 깊이가 얕으리란 생각이 오산인 것처럼 쉽게 쓰인 글이라고 그 사람의 고뇌가 적었다고 말하기엔 근거 또한 치졸하다. 글쓴이의 시간과 속내를 제3자가 어찌 알겠는가! 생활의 한 부분처럼 글쓰기의 고민이 채화되어 그처럼 글이 술술 나온다면야 그 어떤 작가보다도 고민의 산증인인 셈일 텐데 말이다.

나의 글쓰기는 격(格)을 떠올리고, 객관성을 운운한다. 비약이 산이 되고, 순수함을 가장한 뽐내기가 보인다. 그렇기에 글이라는 것에는 늘 생각의 시간이 수반된다. 자칫 어쭙잖은 거만과 허세도 한몫하지만 나는 나의 글 속에서 나의 허점을 만나고 있다. 진정성이라는 키워드를 대입해 부끄러운 마음을 되돌아보게 되고, 이내 바빠진 컴퓨터 자판의 백스페이스(Back Space) 치는 소리는 줄행랑과 다를 바 없다. 백스페이스 키의 ‘다다닥’ 소리에 마감을 앞둔 이 새벽, 정신마저 번쩍 든다.

다음 달 칼럼부터는 ‘솔직’해야겠다. 그리고 시간 속에서 ‘술술’ 써 내려갈 수 있도록 생활의 고민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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