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첫 방송된 tvN 새 교양 토크쇼 '동네의 사생활'에서 여섯 MC는 조선 왕 고종의 개인 서재인 경복궁 집옥재를 방문했다.
집옥재에는 4만여 권의 책이 소장돼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 한다. 2006년에야 개방됐고, 지난 4월 리모델링을 마친 곳이기 때문.
정진영은 "우리 방송을 보고 집옥재에 찾아가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1901년 11월 12일 대한제국의 황태자(훗날의 순종)는 아버지 고종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다음 해가 고종이 망육(望六: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인 51세)이며, 보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해니 성대한 잔치를 벌이자는 내용이다. 고종은 “백성들에 대한 일이 황급하니 진실로 이처럼 여유로운 일을 할 겨를이 없다”며 점잖게 황태자의 청을 거절한다(이하 인용은...
이번에 개방되는 돌담길은 문화재청에서 복원을 추진 중인 '고종의 길' 110m 구간과 이어진다. 또 과거 회극문이 자리했던 덕수궁 담장에 출입문도 설치한다.
시는 2014년 10월 덕수궁 돌담길을 시민에게 다시 여는 '덕수궁 돌담길 회복 프로젝트'를 대사관에 제안했고, 같은 해 11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대사관을 찾아 스콧 와이트먼 전 주한영국대사와 돌담길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19일 탈북자 이모(47) 씨가 고종사촌 채모 씨 등 4명을 상대로 낸 상속재산 회복소송 상고심에서 각하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 씨는 자신의 아버지가 2006년 사망한 직후 탈북했고, 2009년부터 남한주민으로 살게 됐다. 남한에 정착한 이 씨는 2011년 아버지가 실종선고된 사실을 알고 취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상속권을...
1861년 대동여지도는 철종 시기에 초간본이 제작됐고 고종 원년에 재간본이 발행됐다. 실학자 최한기나 고위 관료인 신헌의 도움도 컸다.
우리가 대동여지도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 정확성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첫째로 높은 수준의 지리 정보를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목판으로 인쇄하여 보급한 점이다. 이는 마치 컴퓨터의 주요 프로그램과 백신을 무료로 모든...
명성황후의 행적을 기록한 대표적 역사서인 ‘고종실록’과 ‘매천야록’의 내용이 너무 다르다. 물론 ‘정사’와 ‘야사’라는 입장 차이를 고려할 수 있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예를 들어 ‘매천야록’에는 그녀가 연일 연회를 베푸느라 국고를 탕진한 것으로 돼 있으나, ‘고종실록’에는 사치와 관련된 어떤 언급도 없다. 거기에 두 역사서의 신뢰성에도...
석조전은 1910년에 완성된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서양식 건물이며, 고종에 의해 황제국이 선포된 후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으로 만들어졌다. 문화재청에서 훼손된 석조전을 원형대로 복원해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고, 대한제국의 생활사와 근대의 정치, 외교 의례, 황실사를 담은 공간으로 자주 근대국가를 염원했던 우리의 역사가 담겨있는...
그 뒤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 활동을 재개해 관동창의대장을 맡았다. 이어 전국 의병대장들의 만장일치로 13도 연합의병인 창의군 총대장으로 추대됐다.
13도 창의군은 경기도 양주에서 서울 진공을 개시해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역부족으로 패퇴해 서울 탈환에 실패했다. 진용을 재정비할 무렵 이인영은 부친의...
즉 서기 1108년(예종 3년), 1226년(고종 13년), 1327년(충숙왕 14년) 기록들인데 모두 오성결집이 1년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일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현대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오차가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고려 이후의 오성결집 기록들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황보 승 회원은 천문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수십 개의 오성결집을 찾아내 이...
1896년 일본군 중위를 살해하고 붙잡혀 사형이 선고됐지만 고종의 특사로 형이 중지돼 수감돼 있다가 1898년 탈옥했다.
충남 공주시 마곡사에서 숨어 지내다가 절에서 나온 뒤에는 고향에 학교를 건립해 교육운동을 벌였다. 이후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1910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다.
1919년...
이 책은 고종황제의 막내딸인 대한제국 마지막 황족 덕혜옹주의 삶을 권비영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풀어냈다.
저자는 “제가 진정 원했던 것은 그늘진 역사의 한 귀퉁이에서 잊힐 뻔했던 덕혜옹주를 일깨우는 일이었다”며 “왜곡되고 굴절된 그 시절의 오해로부터 그녀와 그 시대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건져내고 싶었다”고 집필 의도를 밝혔다.
소설은 한정된...
고종황제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황녀로서의 고귀한 삶을 살지 못했던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흔적도 없이 잊힌 그 삶이 너무 아파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권 씨의 소감이다.
사실 소설이 나오기 전에 덕혜옹주의 생애를 다룬 책이 있었다. 부끄럽지만 일본 작가에 의해서다. 혼마 야스코(本馬恭子)에 의해 씌어진 책 이름은 ‘덕혜희’(德惠姬)였다. 그녀는...
고명딸을 몹시도 아꼈던 고종은 외세로부터 대한제국의 금융을 수호하기 위해 1899년 ‘대한천일은행’을 설립했습니다. 정부 관료와 조선 상인들이 주주로 참여한 최초의 민족자본 은행이었죠. 우리은행의 전신입니다.
하지만 ‘빼앗긴 들’에서 조선의 맥을 지키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일본의 압박이 심했거든요. 6살에 2대 은행장에 올랐던 옹주의 오라버니...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개화사상에 물든 그는 고종에게 정치제도 개혁, 민권 신장 추진 등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은 군사 부분만 채택됐다.
이에 그는 독립협회를 지원해 더욱 확실한 개혁을 시도했으나 수구적인 민씨 일파에게 밉보여 파직됐다. 이후 복직해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했지만 결국 친일파에 의해 요직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카드뉴스 팡팡] #고종#보온병#정략결혼… 키워드로 본 덕혜옹주의 삶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했습니다.영화 포스터의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췄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카피가 눈에 들어오는데요.
한일합방·광복…역사의 격랑 속에서 비운의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의 삶을 키워드로 정리했습니다.
#고종1910년 한일합방 후 2년...
고종 19년(1882년)에 비로소 서양식 화폐제도를 도입해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주화와 같은 압인식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의 경화(硬貨)를 근대주화라 한다.
일본의 침략시기인 1878년, 일본 제일은행은 부산에 지점을 내고 부산, 원산, 인천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 화폐를 유통시켰다. 이들은 1902년에 조선 정부의 허락 없이 제일은행권을...
올린 시민은 “대형 서점에 비해 내부가 넓은 편은 아니지만 곳곳에 책을 편히 읽을 수 있는 의자와 책상이 있어 부담 없이 책을 둘러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외에도 서울스토리에는 여행 서적이 가득한 ‘일단 멈춤’, ‘부비책방’, 신발 벗는 만화책방 ‘익살스런 상상’, 고종의 서재 ‘집옥재’ 등 책을 사랑하는 이들을 만족하게 할 다양한 공간이 소개돼 있다.
손예진의 통 큰 투자로 '덕혜옹주'는 난관을 이겨내고 좀 더 세심한 부분까지 살려내며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한편 덕혜옹주는 1912년 조선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나 총애를 받았지만, 고종 사망 후 일본의 감시 속에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조선시대 마지막 황녀다 . 실존 인물 덕혜옹주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덕혜옹주'는 오는 8월 개봉 예정이다.
몽규가 교토(京都) 친구들에게 동주를 이종사촌으로 소개하는 장면도 있는데, 몽규가 동주에게 고종사촌이니 몽규에게 동주는 ‘외사촌’이 맞다.
하지만 이러한 ‘옥에 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윤동주의 문학적, 사상적 생애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받고 죽어 가는 조선 청년들의 마지막을 실감 있게 보여주었다. 특별히 송몽규의 존재를 대중에게...
대원군의 섭정은 쇄국정치로 인해 잃어버린 10년을 만들었고 고종의 친정시기는 황제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일 뿐이었다. 청나라와 일본은 남의 나라 땅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숨죽여 힘을 키우던 일본은 청나라를 제압하더니 1904년 러일전쟁에서는 전 세계가 놀랍게도 러시아까지 물리쳤다. 당시 일본의 육군 병력은 100만 명에 육박했으나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