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억 벌던 가게가 3억4000으로 쪼그라들었다. 줄어든 매출을 메우려 꾼 빚은 1억을 넘어섰다. 그 돈은 가게를 키우는 데 쓰이지 않았다. 거래처 대금 막기, 재료비 지불, 임금 돌려막기. 내일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오늘을 넘기기 위한 연명이었다. 이것이 경기도 소상공인 3100명을 2년간 한 명 한 명 찾아가 마주 앉아 물은 끝에 나온 대한민국 자영업의 현주소다.

김광희 고려대 경제학과 겸임교수가 좌장을 맡고, 이상백 경기도소상공인연합회 회장, 이효근 한뫼경영컨설팅 대표, 허훈 백석예술대 교수, 조혜정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이 패널석에 섰다. 경기도와 시·군 소상공인지원담당 공무원, 경기도소상공인연합회·상인연합회 관계자들이 참관석을 메웠다. 발제는 경기신보 경영기획본부 정기헌 차장대우(경제학 박사)가 맡아 47쪽 분량의 분석 자료를 한 장 한 장 풀어냈다.
△ "빚의 목적이 바뀌었다"…투자에서 생존으로
백서의 첫 번째 경고는 매출과 대출의 '가위 벌림'이다. 2024년 경기도 소상공인 전체 평균 매출액은 3억 9957만 원. 전년(4억 5981만 원)에서 13.1%가 증발했다. 제조업(-13%)과 건설업(-27%)의 타격이 컸고, 도소매업(-11%)까지 전방위 충격이 확인됐다. 반면 2025년 운영 관련 대출 평균은 1억335만원으로 전년(8712만 원) 대비 18.6% 팽창했다.
문제는 그 돈이 어디로 갔느냐다. 대출 이유 1위는 '거래처 대금 지급 등'(53.5%). 사업 확장(20.5%)이나 시설투자(13.3%)는 뒷전이었다. 임금 지급(6.1%)을 위해 대출하는 사례까지 나왔다. 발제자 정기헌 차장대우의 표현이 정곡을 찔렀다. "임금과 임차료를 빌려서 내는 것은 폐업의 전조 증상이다. 외부 지원이 끊기는 순간 즉각 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최후의 경보'다."
빚의 성격이 '미래를 만드는 투자'에서 '오늘을 넘기는 연명'으로 전환된 것. 소상공인 금융의 가장 위험한 구조 변화다.
△ "98.5%가 계속하겠다"…숫자 뒤의 두 얼굴
그런데도 사업 지속 의지는 98.5%로 전년(96.7%)보다 오히려 올랐다. 이 숫자를 액면 그대로 '희망'으로 읽으면 현실을 놓친다. 사업을 이어가는 이유를 물었더니 '경기회복 기대'(36.9%)와 '특별한 대안이 없어서'(32.6%)가 나란히 상위에 올랐다. 희망과 체념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풍경이다.
경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 1위는 여전히 물가 상승(34.9%)이었지만, 주목할 변화는 '상권 변화 및 쇠퇴'(24.4%)가 전년 대비 2.6%포인트 급등한 것이다. 가격을 올리면 손님이 떠나고, 올리지 않으면 원가에 잡아먹힌다. 가격전가 불능 상태에 진입한 소상공인에게 물가 상승은 더 이상 '일시적 어려움'이 아니라 '상시적 위기'다.
소상공인의 종합적 삶의 만족도는 3.4점(5점 만점), 업무 피로도는 3.3점. 만족감과 피로감이 거의 같은 수준이라는 것은 사업을 운영하며 얻는 보람만큼 쌓여가는 탈진이 있다는 뜻이다. 특히 숙박업의 피로도 상승폭이 전년 대비 가파르게 치솟아 업종별 경영 부담의 양극화도 선명해졌다.

백서가 가장 무겁게 다룬 챕터는 폐업이다. 패널 3100명 중 238명(7.7%)이 사업장 문을 닫았다. 폐업 사유의 80.6%는 '수익성 악화·매출 부진'. 그러나 폐업은 고통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권리금 회수 및 업체양도'(22.6%)가 꼽혔다. 소상공인이 은퇴나 재기를 위해 마지막으로 쥘 수 있는 자본인 권리금이 증발하는 순간, 모든 투자는 매몰비용으로 변한다.
대출금 상환 압박(17.7%), 철거비·원상복구비 등 평균 2000만 원에 달하는 폐업비용(8.1%)까지 한꺼번에 밀려온다. 폐업자가 가장 원하는 정부정책 1위가 '폐업비용 지원'(56.5%)인 이유다. 폐업 이후에도 재창업을 했거나 준비 중인 비율이 24.2%였고, 현재 계획이 없는 이들 중에서도 18.4%가 평균 2.4년 이내 재창업 의향을 밝혔다. 재도전의 불씨는 살아 있지만, 그것이 양질의 일자리 전환이 아니라 취업 실패에 따른 비자발적 재창업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는 것이 백서의 경고다.
△ 디지털 양극화…"검색은 하는데 돈은 못 번다"
디지털 전환의 풍경은 더욱 극적이다. 소상공인의 37.9%만이 디지털 기기를 일상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정보검색 능숙도(55.4%)와 생성형 AI 콘텐츠 제작 능숙도(16.7%)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검색'은 보편화됐지만 그것을 '매출'로 연결하는 역량은 소수에게 독점된 것이다.
법인사업자의 디지털 이용률(57.0%)과 개인사업자(34.8%)의 격차는 22.2%포인트. 업력 22년 이상 고업력 사업자의 디지털 기기 미이용률은 71.3%에 달해 세대 간 디지털 양극화가 상권 쇠퇴를 가속화하는 구조적 요인임이 확인됐다. 60대 이상 소상공인의 생성형 AI 활용 능숙도는 10.1%에 불과해, AX(AI 전환) 시대의 진입 장벽이 이미 세워지고 있다.
△"보증이 경영의 마인드를 바꾼다"…데이터가 입증한 신용보증의 힘
암울한 지표 속에서 백서가 포착한 유의미한 발견이 있다. 경기신보의 신용보증을 이용한 소상공인은 미이용 소상공인 대비 매출증가업체 비율이 6.0%포인트 높았고, 20% 이상 매출이 급감한 비율은 3.3%포인트 낮았다. 영업이익 증가사업자 비율도 0.5%포인트 앞섰다.
더 주목할 것은 투자 의지의 차이다. 향후 1년 이내 사업 투자·확장 계획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보증 이용업체(18.9%)가 미이용업체(13.8%)를 5.1%포인트 웃돌았다. 시설·설비 투자, 신제품 개발, 마케팅 강화 등 실질적 경영고도화 항목에서 이용업체의 의지가 두루 높았다. 보증 지원이 단순 자금 수혈이 아니라 '심리적·재무적 안전판' 역할을 하며 공격적 경영으로의 전환을 유도한다는 증거다.

세미나의 하이라이트는 정책 제언이었다. 발제자는 대한민국 소상공인 정책의 근본적 구조 전환을 촉구하며 다섯 가지 제언을 쏟아냈다. 그 가운데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것은 '공공매입임대 상가 전세 전환형 보증모델'이다.
구조는 이렇다. 경기도와 GH(경기주택도시공사)가 도심 공실 상가를 매입해 공공임대 상가로 지정하고, 이를 월세가 아닌 전세 전용으로 운영한다. 경기신보가 해당 전세권에 100% 보증서를 발급하고, 경기도·시군이 이자 일부를 보전한다. 소형상가 월세 150만원 기준 시뮬레이션 결과, 전세 전환 시 월 부담은 약 108만원으로 28% 절감된다. 결정적 차이는 폐업 시다. 월세는 매달 증발하는 매몰비용이지만, 전세보증금 약 2.6억원은 회수 가능한 자산이 된다. 폐업 시 인테리어비와 권리금이 전액 손실되는 현재의 구조를 깨는 발상의 전환이다.
기업 생애주기별 보증체계 전면 개편안도 무게감 있게 다뤄졌다. 현재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지역신용보증재단이 창업부터 재기까지 전 범위를 중복 포괄하는 구조를 탈피해,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창업·데스밸리 극복·재기를, 기술보증기금은 혁신성장을, 지역신용보증재단은 지역산업 육성을, 신용보증기금은 성장·완숙단계 레벨업을 각각 전담하자는 구상이다.
금융기관의 '무임승차'를 차단하는 거버넌스 도입 제안도 파격적이었다. 90~100% 보증으로 사실상 리스크가 소멸된 대출에서 은행이 거둬가는 가산금리 수익 일부를 '경기도소상공인상생기금'으로 강제 출연하게 하고, 부실 발생 시 대출 실행 은행이 손실의 10~20%를 먼저 부담하는 '퍼스트 로스(First Loss)' 구조를 도입하자는 내용이다.
△ "통계집이 아니라 정책 설계도를 만들었다"
시석중 이사장은 "이번 백서는 단순한 통계자료집이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와 방대한 데이터를 결합해 소상공인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진단한 보고서"라며 "구조적 문제를 정확히 짚고 실효성 있는 정책으로 연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이번 세미나를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경기신보는 데이터 기반의 정밀 맞춤형 지원을 통해 소상공인의 사업 성공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고,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을 구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경기도 31개 시·군, 3100개 사업체, 100% 방문면접조사, 83.5%의 패널유지율. 이 백서가 다른 소상공인 실태조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동일한 사람을 해마다 찾아가 물었다는 것이다. 단일 시점의 스냅샷이 아니라 같은 가게, 같은 사장님의 1년간 변화를 추적한 '동태적 진단서'다. 올해가 2차연도, 내년 3차연도 조사에서는 폐업추적과 ESG, AI경영까지 범위가 확장된다.
소상공인 790만 시대. 대한민국 경제의 저변을 이루는 이들의 문제는 더 이상 '자영업자 개인의 일'이 아니다. 경기신보가 데이터를 무기로, 정책 설계도를 들고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3,100명의 목소리가 담긴 이 백서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우리는 소상공인에게 '빚을 더 쉽게 빌려줄 것인가', 아니면 '빚 없이도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