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부진한 속도에 강한 불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 국회의 입법 지연을 빌미로 25% 관세 인상 카드를 꺼내 들자, 국내 산업계는 사실상 추가 투자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적 압박’으로 규정했다. 미국 현지에 이미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부은 우리 기업들로선, 국회의 입법 속도까지 관세와 연동시키는 트럼프식 ‘투자의 늪’에 빠져 퇴로 없는 생존 게임을 강요받게 됐다. 이미 투자 여력이 한계치에 다다른 우리 기업들은 “미국 측의 요구가 갈수록 무리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며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27일 산업계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정부의 대응을 주시하고 있다. 관계 부처가 긴급 대책 회의를 소집하며 발언 배경 분석에 착수했지만, 기업 현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동하며 비상 경영에 돌입한 상태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발언을 한국이 미국에 약속한 투자를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특별 법안이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데 대한 문제 제기로 보고 있다. 해당 법안은 현재 소관 상임위원회인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앞서 한미 양국은 지난해 10월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이후, 11월 13일 안보·무역 분야 합의 내용을 정리한 공동 팩트시트를 발표한 바 있다. 양국은 한국이 3500억 달러(약 505조 원) 규모의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 대미 투자를 진행하고, 미국은 한국산 자동차 등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특별법이 국회에 제출되면 그 달 1일자로 소급 적용해 관세를 인하하겠다는 방침도 세웠다.
하지만 이후 원·달러 환율 급등과 외환시장 불안 등의 영향으로 대미 투자 움직임이 둔화 되자, 미국이 다시 관세 인상을 거론하며 압박 수위를 높인 것이다. 미국 측의 메시지는 한미 무역·안보 협력의 조건으로 제시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서둘러 이행하라는 요구로 해석된다. 정해창 대신증권 연구원은 “트럼프의 25% 관세 카드는 한국의 입법 무산이 아니라, 지지부진한 입법 속도에 대한 강한 불만 표시이자 조속한 이행을 압박하는 벼랑 끝 전술”이라고 분석했다.
반도체는 미국이 가장 민감하게 바라보는 분야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요 대상으로 거론된다. 미국은 반도체 기업의 자국 내 생산 확대와 공급망 통제권 확보를 추진해 왔다. 대만의 TSMC는 미국에 생산시설뿐 아니라 연구개발(R&D) 시설까지 구축한 사례로 꼽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이미 미국에 반도체 팹을 건설 중이지만, 추가 투자 압박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관세가 25%로 다시 인상될 경우 가장 큰 타격은 미국 수출 비중이 높은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다. 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에 따르면 현대차·기아, 한국GM, 르노코리아 등 완성차 5사는 지난해 북미 지역에 164만9930대를 수출했다. 이 가운데 현대차와 기아의 북미 수출 물량만 119만6862대에 달한다. 나이스신용평가는 대미 자동차 관세율이 25%일 경우 현대차그룹의 연간 관세 비용을 8조4000억 원으로 추산했다. 관세가 15%로 유지되면 5조3000억 원 수준으로, 약 3조1000억 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를 협상 수단으로 활용해 추가 투자나 양보를 요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공식 절차와 시점이 제시되지 않은 점을 들어 ‘TACO(Trump Always Chickens Out)’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실제 관세 인상으로 이어질 경우 충격은 즉각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기업들은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15% 관세를 전제로 가격과 생산 계획을 짠 상황에서 관세가 다시 25%로 오르면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며 “발언이 협상용인지 실제 정책으로 이어질지 불확실한 만큼 당분간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