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너머] 생산적 금융이 가야 할 길

입력 2026-01-0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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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 금융'이란 말이 금융권을 빠르게 점령했다. 부동산 담보 중심의 금융 관행을 깨고, 벤처·혁신 기업으로 자금을 돌리겠다는 정부의 취지가 투영됐다. 성장률 둔화와 산업 불확실성이 커지는 국면에서 자본의 방향을 바꾸겠다는 정책 목표도 분명하다. 종합투자계좌(IMA)와 발행어음 인가를 새로 확보한 증권사들이 앞으로 3년 간 20조 원 이상의 모험자본을 공급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는 자금의 경로를 부동산에서 산업으로 돌리겠다는 방침이고, 증권사는 그 과정에서 자금 조달의 관문을 맡을 예정이다.

다만 목표가 수치로 제시될 때, 시장은 그 수치에 맞춰 움직이기 쉽다. 공급이 확대될수록 현장에서는 혁신을 가려내는 판단보다 자금을 집행할 수 있는 그럴듯한 '그릇'을 먼저 찾게 되고, 속도가 붙을수록 이런 경향은 더 강해진다. 자금은 생산성 제고가 기대되는 기업으로 곧장 유입되는 대신 단기간에 규모를 만들 수 있고 설명이 쉬운 영역으로 쏠릴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 생산적 금융이 의도한 효과가 나타나려면 공급 규모 자체보다 자금이 엉뚱한 곳으로 새지 않도록 걸러내는 선별력이 우선적으로 확보돼야 한다.

자금이 유입되더라도 적정한 밸류에이션(기업 가치)을 발견하고 자금 재배치가 이뤄지지 못하면 시장은 왜곡된다. 모험자본은 위험을 가격에 반영하고 시간에 걸쳐 성과가 검증되는 자본이다. 이 과정에서 축적돼야 할 것은 투입 실적이 아니라 성과와 손실, 그리고 그 결과를 반영하는 일이다. 그러나 가격발견 기능과 회수 경로가 충분히 두텁지 않으면 자금은 좋은 곳으로 깊게 스며들기보다 담기 쉬운 곳에 얕게 고이기 쉽고, 그렇게 쌓인 돈은 향후 변동성 확대나 수익률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투자은행(IB) 업계 일각에서는 '고사해야 마땅했던 벤처캐피탈(VC)·사모펀드운용사(PEF) 하우스까지 이번 기회에 살아난다'는 말이 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금 접근성이 높아지면 단기적으로는 생태계 외형이 확대될 수 있지만, 선별 기준이 느슨해질 경우 시장 과열로 나타날 수 있다. 핵심은 돈이 흐르는 질서다. 생산적 금융이 실질적인 생산성 제고로 연결되려면 '옥석가리기'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를 먼저 강화해야 한다. 인프라 공백 상태에서 자금만 빠르게 늘면 생산적 투자 대신 부실 위험이 확대된다.

생산적 금융 전환은 필요하다. 그래서 더 엄격해야 한다. 공급 확대만으로 목표가 달성되기 어렵다.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금이 빠르게 유입되면 정책 효과는 약화할 수 있다. 모험자본 20조 원은 단순한 공급 규모가 아닌, 자금이 '맞게' 흐르도록 하는 질서를 세우는 숫자다. 자금이 적합한 용처로 배분되도록 선별 기준을 정교화하고, 인프라부터 촘촘히 세우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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