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자사주 소각 피해 EB 발행으로 자금 조달
소각 회피 수단vs합법적인 자금 조달 수단

국내 기업들의 교환사채(EB) 발행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권에서 기업가치 제고를 명분으로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추진하자, 소각이 강제화되기 전에 EB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려는 수요가 급증한 탓이다.
16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들어 전날까지 기업들이 발행한 교환사채(EB) 발행 규모는 총 4조5682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1조8048억 원 대비 153% 증가한 수준이다. 발행 건수는 53건에서 129건으로 두 배 넘게 증가했다.
상장사 중에서는 △HD한국조선해양(6000억 원) △SK이노베이션(3767억 원) △SKC(2600억 원) △SK케미칼(2200억 원) △LS전선(2000억 원) △넷마블(2000억 원) 등이 발행액 상위를 차지했다. EB는 채권이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사주나 타사 주식 등 사전에 정한 주식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증권이다.
문제는 EB 발행이 늘어난 배경이다. 정권 교체 이후 여당을 중심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자본시장 개혁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주요 정책 과제로 부상했다. 실제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3차 상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기업들은 자사주를 소각하는 대신 EB 발행을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자사주를 그대로 보유한 채 EB로 전환하면 당장 소각으로 인한 주식 수 감소 효과는 없지만, 자사주를 활용해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다. 또 투자자들이 채권 만기까지 자사주로 교환하지 않으면 자사주가 그대로 남아 지배구조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도 기업에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소각 회피 수단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EB 발행을 둘러싼 사회적·정치적 부담이 커지자 발행을 철회한 사례도 나왔다.
다만, 기업들은 EB 발행이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자금 조달 수단이라고 강조한다. 금리 변동성과 경기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은행 차입이나 일반 회사채 발행보다 EB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향후 관건은 정책 방향이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만약 EB를 통한 자사주 활용에 추가적인 규제가 도입되면 기업들의 자금 조달 전략은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맞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