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가분리·ICO 금지 후유증
美·EU·日 등 국가전략 산업화 속도

정부가 디지털자산 2단계 입법을 추진하며 규제 체계 개편에 나서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국내 제도가 여전히 2017년 긴급대책 중심의 해석과 관행에 묶여 있어 실질적 변화가 더디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로벌 규제 환경이 빠르게 바뀌는 만큼 한국도 정책 기조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9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디지털자산 2단계 입법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10일 제출 예정인 이번 법안은 발행·유통·사업자 규제 전반을 아우르는 체계를 마련해 기존 가상자산 이용자보호법(1단계 법안)에 담지 못한 영역을 보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재 국내 가상자산 산업을 규율하는 법적 틀은 1단계 법안과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두 축이 중심이다. 하지만 둘은 각각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자금세탁방지(AML)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현장에서는 2017년 마련된 긴급대책을 토대로 한 금융당국의 해석과 정책 방향이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긴급대책은 가상자산이 등장한 초기, 사기·투기 사례가 잇따르던 시기라는 점에서 일정 부분 불가피한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금가분리(금융권의 가상자산 배제), 가상자산 공개(ICO), 신용공여 및 마진거래 금지 등을 핵심으로 한 이 대책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규제의 기준점으로 굳어져 산업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남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금가분리 기조가 지속하면서 ‘그림자 규제’가 작동해 국내 금융회사는 해외 대형 은행들이 가상자산 사업을 적극적으로 확대하는 흐름을 지켜만 봐야 하는 실정이다. 금융권 참여가 봉쇄된 결과, 국내 가상자산 생태계는 스타트업과 거래소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구축됐고 블록체인 기반 금융혁신이 구현되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8년에는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 자산 매매·중개업이 벤처 인증 불가 업종으로 지정되면서 성장의 문을 더욱 좁혔다. 올해 9월, ‘벤처기업법 시행령’ 개정으로 제한이 해제됐지만, 그 사이 국내 유망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은 이미 해외로 빠져나갔다는 게 업계 전언이다.
이와 달리 미국·유럽연합(EU)·싱가포르·일본 등 주요국들은 가상자산을 규제 대상이 아닌 미래 금융 인프라 강화를 위한 전략산업으로 규정하며 정책 기조를 근본적으로 전환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발동된 행정명령을 계기로 ‘위험 관리’ 중심의 시각에서 ‘경쟁력 확보’ 중심의 접근으로 방향을 틀었고, EU·싱가포르·일본도 명확한 규제 체계를 마련해 가상자산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2017년의 방어적 규제 틀에 갇혀 제도 전환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해외가 가상자산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제도화하며 속도를 내는 동안, 한국만 초기 대응 모드에 머물러 갈라파고스화가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한서희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지금 시대에 맞는 규제를 새로 설계하고, 가상자산의 위험뿐 아니라 효용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