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ㆍ3 비상계엄’으로 금융권은 거대한 불확실성에 직면했다. '관치금융'의 태생적 한계로 인한 정부, 금융당국의 혼란은 운신의 폭을 극도로 제한했다. 정치적 혼란이 남긴 불신이 뼈아팠다. 국내외 투자자들은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으로 한국 금융시장의 안정성에 의문을 품었다. 위기 극복은 금융권을 대표하는 슬로건으로 자리잡았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면서 '금융 나침반'의 좌표는 분명해졌다. 부동산에 쏠린 자금을 첨단산업 투자와 취약차주 지원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금융권도 방향성에 대해선 공감한다. 문제는 속도다. 포용금융의 외피를 두른 관치금융이 거세져 금융사의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금융 공급 전환의 강도가 강해지면서 시장이 스스로 가격을 매기고 위험을 가르는 기능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사의 자본여력과 금리의 가격 기능이 정책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자금 배분'에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4대 금융(KBㆍ신한ㆍ하나ㆍ우리)이 국민성장펀드에 매년 2조 원(5년간 10조 원)과 함께 각각 자체펀드로 1조4000억 원~3조 원을 추가 투자할 경우 보통주자본비율(CET1)은 현 수준(3분기 기준)에서 0.18~0.19%포인트(p)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위험가중치를 100%로 둔 가정치로 실제 규제·감독 해석이나 투자 구조에 따라 부담이 확대될 수도 있다.
CET1은 금융사가 손실을 흡수할 수 있는 '완충의 두께'다. 이 비율이 내려가면 배당·주주환원 여력이 줄고 같은 규모의 기업대출·혁신투자를 집행해도 위험가중자산(RWA)이 더 빠르게 불어나 기업대출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여기에 은행권이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 제재로 2조 원 규모의 과징금을 통보받으면서 자본 여력에 대한 부담은 한층 더 커졌다.
최정욱 하나증권 연구원은 "생산적 금융 전환으로 은행들의 자본비율 약화가 불가피하다"며 "핵심 성장산업 대출이 늘면서 내년 전체 기업 여신이 약 6~7%(올해 예상치 3~4%)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CET1 하락 압력이 있기는 하지만 자본규제 합리화로 위험가중치가 개선되면 외려 18bp(1bp=0.01%포인트) 가량 낮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위험 신호는 이미 켜졌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9월 말 국내은행 기업대출 연체율은 0.61%로 전월 대비 낮아졌지만 전년 같은 기간 대비 0.09%p 상승했다. 경기 둔화가 지속되면서 기업대출 연체율이 다시 오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여기에 교육세·법인세 인상으로 세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새도약기금(배드뱅크) 출연 등 추가 부담까지 겹치며 금융권에 '청구서'가 잇따르고 있다.
김영도 금융연구원 선임위원은 "생산적 금융을 공격적으로 확대할 경우 적정 연체율과 자본비율 등 재무안정성도 확보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며 "성장성 및 수익성 확보를 위해 기존 경영전략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기준이 사라진 포용금융도 시장의 기능을 약화하고 있다. 취약차주의 이자 부담을 낮추기 위한 우대금리·정책성 지원이 확대되면서 신용도가 높을수록 금리가 낮아지는 '위험에 기반한 가격원칙'이 약화하고 있다.
은행연합회 공시에 따르면 11월 말 기준 일부 은행의 600점 이하 저신용자의 신용대출(신규취급액) 금리가 일부 상위 구간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부산은행의 600점 이하 구간 금리는 연 9.58%로 700~651점(10.25%)보다 낮다. 제주은행도 600점 이하 금리(연 9.18%)도 700~651(13.50%)보다 더 낮았다.
기업대출에서도 금리 왜곡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기업대출(신규취급액) 금리는 연 3.96%로 전월보다 0.03%p 떨어졌다. 대기업 대출 금리(연 3.95%)는 0.04%p 올랐지만 중기대출 금리(연 3.96%)가 0.09%p 급락했다. 중기대출 금리가 연 3%대로 내려온 것은 2022년 5월 이후 처음이다. 담보가 더 확실한 주택담보대출 금리(연 4.11%)보다 더 낮은 '역전 현상'도 석 달째 이어지고 있다. 위험 대비 가격 구조가 합리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신호인 셈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포용금융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가격 기능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함께 가야 한다"며 "저신용자·고위험군 대출을 확대하려면 대손충당금을 더 쌓아야 하고 취약계층 신용을 정교하게 반영할 대안신용평가 모델도 필요하지만 관련 제도와 감독 기조가 보수적으로 작동한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포용금융을 금리 인하로만 밀어붙이기보다 위험을 정교하게 평가하고 부담을 분산하는 장치를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융시장의 신용 평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리스크가 실물로 전이될 수 있다"며 "시장에서는 신용에 맞게 자금을 공급하고 정부는 기금을 통해 저신용자에게 저금리의 자금을 공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