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분위기는 대통령의 언어에서 비롯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금융사를 향해 '고금리 장사', '전당포식 영업'이라고 표현하며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예대마진으로 손쉽게 돈을 버는 기득권 업종, 서민에게 부담을 지우고 성과급을 챙기는 산업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금융이 실물경제와 취약계층을 더 두텁게 돕지 못했다는 비판은 일정 부분 타당하다. 하지만 그 비판이 금융권에 '무조건적인 책임'이라는 낙인을 찍고 있다는 점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 대통령의 발언 의도는 분명하게 읽힌다. 부동산에 흐르는 '돈길'을 전략산업과 자본시장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은행에 쌓인 이익을 국가 성장 프로젝트의 마중물로 삼겠다는 구상도 엿볼 수 있다. 금융을 민간 산업이 아니라 공적 자금을 운용하는 일종의 '정책 플랫폼'으로 보는 인식이 깔려있다.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인공지능(AI)·반도체·바이오 등 첨단산업을 키우겠다며 메가 플랜을 내놨고 이 가운데 절반을 민간에서 조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돈을 내야 하는 금융권은 언론 보도를 통해 윤곽을 접했다. 위험과 수익을 어떻게 나눌지, 어떤 방식으로 출자할지에 대한 논의보다 "정부가 큰 방향을 정했고 민간은 따라오라"는 메시지가 앞섰다.
비슷한 장면은 그 뒤로도 반복됐다. 교육세율 인상, 보이스피싱 피해액 분담(무과실 배상책임), 배드뱅크(새도약기금) 출자 논의까지. 재원이 필요할 때마다 금융사들은 가장 먼저 호출됐다. 규제와 인가 권한을 쥔 당국을 상대로 금융사들이 "이번엔 어렵다"고 선을 긋기란 쉽지 않다. 겉으로는 '자율 참여'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의무 참여'에 가깝게 받아들여진다.
최근 이 대통령이 저신용자 금리 인하 필요성을 언급하며 "금융이 잔인하다"라고 말한 것은 이런 분위기에 쐐기를 박았다. 대출 금리는 '위험에 대한 가격'이다. 고신용 대출 금리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그만큼 저신용쪽 금리를 낮추는 구조를 만든다면 이는 위험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누구를 보조할 것인가'의 문제로 바뀐다.
금융회사 장부 안에서 특정 집단의 부담을 다른 집단에 떠넘기는 식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자율경영의 공간은 좁아지고 의사결정은 정치 일정과 여론 흐름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물론 금융사들에도 잘못은 있다.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와 주택담보인정비율(LTV) 담합 의혹 등을 통해 스스로 신뢰를 깎아 먹었다. 소비자 피해와 시장 왜곡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
문제는 '과거 잘못에 대한 책임'과 '현재·미래 정책 부담'이 한데 뒤섞여 금융권을 압박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쪽에선 수조 원대 제재 가능성이 거론되고 다른 한쪽에선 정책펀드와 각종 부담금 참여를 요구받는다.
이런 분위기는 정부가 강조하는 생산적 금융이 뿌리내리는 데에도 적잖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최근 5대 금융지주는 508조 원 규모의 생산적 금융 공급 계획을 내놨다. 이 계획이 실효를 거두려면 전략산업에 자금을 공급하고 혁신기업의 위험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금융권이 먼저 자기자본과 리스크 관리 역량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이익을 쌓는 순간 "국민 앞에 내놓으라"는 청구서가 따라붙는다면 위기 때 앞장서서 충격을 떠안으려는 금융권의 여력과 의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자 장사를 비판하고 금융의 공공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 과정에서 '선'을 지키는 일이다. 은행이 잘못했을 때 매를 드는 것과, 금융의 기본 원칙 자체를 흔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정부와 정치가 금융을 그저 다루기 쉬운 '돈줄'이 아니라 규칙 안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산업으로 존중할 때 비로소 말뿐인 생산적 금융을 넘어 지속 가능한 금융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