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사들은 AI를 활용한 업무 자동화 시스템을 빠르게 도입하고 있다. 고객 상담 챗봇이나 내부 업무의 자동화시스템 등은 이미 일상화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단순한 효율화나 비용 절감을 넘어 금융산업의 근본 질서를 바꾸는 스테이블코인, 토큰화 자산 거래 등의 디지털 전환에는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다.
금융사들의 의지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금융당국 조직개편이 지연되면서 금융 정책의 주요 의사 결정이 미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한국은행이 금융정책과 감독 기능을 분리하는 안을 두고 이전투구하는 사이 시장의 시간은 멈췄다.
제4인터넷전문은행 예비인가 심사는 기약 없이 미뤄졌고 스테이블코인 규제와 가상자산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논의는 ‘올스톱’됐다. 금융사 핵심 신사업인 핀테크 지원 예산은 바닥을 보이고 있는데 내년도 예산 논의는 시작도 못 했다.
금융사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기술 변화에 맞는 전략을 다시 점검하고 중장기적 성장 로드맵을 스스로 설계해야 한다. 신사업 추진에 주저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리스크를 관리하며 혁신을 지속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시장의 흐름을 읽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기일수록 공동체의 지혜로 공백을 메우는 것이 결국 더 큰 위기를 막을 수 있다. 이미 해외 유수의 은행들은 한발 앞서 움직이고 있다. 가상자산 커스터디, 즉 고객의 가상자산을 대신 안전하게 보관·관리해주는 서비스를 새로운 사업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자산을 토큰화해 거래하는 플랫폼을 구축하거나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기업 간 송금 서비스를 실험하는 투자은행(IB)도 등장했다.
단순히 새로운 자산을 취급하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 금융의 새로운 표준을 선점하기 위한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금융 환경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감하게 신사업에 투자하고 기술적·제도적 기반을 선제적으로 마련해 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혁신은 멈추는 순간 도태된다. 디지털 전환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속도를 유지하는 일이다. 물론 이것은 특정 기업이나 기관만의 과제가 아니다. 산업 전체가 함께 방향을 모색하고 민관이 손을 맞잡아 실행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내부 인재 양성과 기술 투자다. AI, 블록체인, 데이터 사이언스 등 핵심 분야의 인재 확보는 필수불가결하다. 내부 인재를 키우는 동시에 외부 전문가와의 협업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기술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조직의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새로운 표준을 만들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누가 먼저 변화에 적응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금융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 금융권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공백을 넘어 혁신의 속도를 끌어올리는 것, 그것이 지금 금융산업의 생존 전략이자 성장 전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