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국들 전략적 모호성 유지할 듯
한국, 주요국 파트너십 강화 중요
무역 활로, 전 세계로 확 넓혀야”
정치의 언어는 타협이 아닌 대립으로, 경제의 온도는 계층에 따라 극단으로 갈라졌다. 부와 일자리, 교육과 기회가 양극단으로 치닫자 중산층은 붕괴되고 청년 세대는 계층 이동의 희망을 잃었다. 공존의 균형은 무너진 지 오래다. 이념보다 감정이 정치의 기준이 되고 사회는 협력 대신 불신으로 굳어갔다.
최근 방한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민주주의 안에서도 최소한의 공존이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한국의 부의 집중이 민주주의 지속 가능성을 흔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양극화는 이제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문제다. 성장과 신뢰, 민주주의의 토대를 동시에 흔드는 시대의 균열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본지는 그 균열의 원인을 진단하고 다시 공존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해법을 모색한다.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이 정면충돌하면서 전 세계 양극화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며 돌아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사상 첫 3연임에 이어 4연임마저 노리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편 가르기를 주도하고 있다. 양국과 경제, 외교안보 측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한국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절실해진 상황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자국 우선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이다. 극심한 무역적자를 탈피하고 제조업 자립을 유도하며 공급망 탈중국을 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전 세계에 관세를 매기고 중국에는 첨단 반도체 수출을 통제했다. 중국 수출 통제의 경우 미국의 동맹국 기업들까지 제재나 압박을 받게 됐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유발한 양극화는 두 개의 커다란 블록이기보다 ‘미국 대 나머지 세계’라는 구도로 요약될 만큼 자국 우선주의 성격이 강하다. 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종식을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다자기구를 향한 반기, 자국 우선주의 등은 세계 공급망과 교역 구조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글로벌컨설팅 기업 롤랜드버거는 최근 보고서에서 “관세는 중국과 캐나다로부터의 이탈을 촉진하는 동시에 멕시코 공급업체를 부양하고 동남아시아로부터의 해상 운송 물량을 늘렸다”며 “이러한 재편이 지속할지는 관세 기간과 강도, 새 공급 경로의 회복력에 달렸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미국이 다자주의 리더 자리를 내려놓은 틈을 노리는 중이다. 대표적인 게 지난달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고 WTO 개혁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다자주의는 초기 단계다. 현재로선 우방과의 결속 강화에 주로 힘을 싣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달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서 양옆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앉혔다. 3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66년 만의 일이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주도로 탄생한 브릭스(BRICS)가 브릭스 플러스로 확장하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으로 시작했던 블록은 이제 볼리비아, 벨라루스, 태국, 인도네시아 등 유럽과 동남아시아로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올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렸던 제17차 브릭스 정상회의에서도 ‘트럼프 규탄’과 ‘다자주의 존속’이 회원국들의 주된 입장이었다.
전문가들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냉전 때와 달리 현 미·중 경쟁에 복잡한 경제 관계가 얽혀 있는 만큼 장기간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라이언 하스 브루킹스연구소 존 L. 손튼 중국센터 소장은 “지금의 미·중 관계는 냉전 시대와는 상당히 다르다”며 “예를 들어 미국과 중국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여전히 깊은 상호 의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냉전 시대에는 주로 군사, 이념적 대립이었다면 미·중 경쟁 핵심은 기술을 중심으로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이나 중국이 가까운 시일 내에 무너지거나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종속되는 모습을 보일 가능성은 작다”며 “결과적으로 미·중 경쟁은 향후 수십 년 동안 국제 체제의 지속적인 특징으로 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아시아태평양 안보석좌는 “중견국들은 자율성을 지키고자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거고 한국도 가능 범위 안에서 미·중 간극을 메우려 할 것”이라며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상황이 명확하다. 중국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해야 하고 동시에 중국은 한국을 반대 방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강하게 압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달 말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대해선 “이재명 대통령은 강대국 간 긴장을 완화하는 다자 경제 정상회의를 주최함으로써 한국의 리더십을 확고히 해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의 우호적인 회동을 성사시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무역 현안은 한미 관계를 악화해 방위 협력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이 대통령은 중국의 과잉 생산과 광물 통제, 미국의 관세 문제를 다루고 일본, 호주, 필리핀, 인도 등 주요 지역 파트너들과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 밖에 최근 미국 외교 전문지 디플로맷은 “미·중 갈등이 심해진 지금 한국이 동남아시아, 인도와 같은 고성장 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유럽 시장 진출을 확대하는 등 무역 활로를 전 세계로 넓히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