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 관세전쟁’ 시대를 맞아, 산업 전략의 패러다임 전환이 불가피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직면한 고관세 장벽을 넘어설 해법으로 초격차 기술 확보와 대체 불가 상품 개발을 제시한다. 이는 고관세로 인해 약화되는 가격경쟁력을 기술력으로 상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부의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와 핵심 원자재 공급망의 안정화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간 한국은 해외에서 상용된 기술·상품의 단점·한계를 보완해 완성도를 높인 신상품을 개발하고, 생산력과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을 활용했다. 하지만 수출국 관세가 오르고, 해당국 생산품 대비 국산품의 상대가격이 오르면 국산품의 가격경쟁력은 떨어진다. 국산품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필요한 건 ‘대체 불가성’이라는게 공통된 시각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국내 기업과 국산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새로운 기술로 기존 상품을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혁신하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등 특정 수출품목의 의존도를 낮출 필요성도 제기된다. 한국의 반도체는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수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 등의 공격적인 투자로 경쟁력이 위협받고 있어서다. 이미 경쟁이 포화 상태인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기술 투자를 늘리면서 생산비용을 줄여야 하는데, 이 중 과도한 생산비용 절감은 내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인공지능(AI), 바이오 등 미래 기술 분야에서 경쟁력을 높이거나, 소수 국가·기업이 독점해 사실상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시장에 선제적인 기술 투자 확대가 요구되는 배경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반도체뿐 아니라 전반적인 산업구조가 신산업을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디지털화 속도가 빨라지고, AI 활용이 늘며, 바이오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며 “특정 산업보단 신산업이라는 큰 틀에서 기술력 우위를 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단, 신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려면 광물 등 원자재가 필요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기 수요 변동성이 커지면서 글로벌 공급망의 불확실성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전쟁, 국가 간 갈등 등 국제정세가 공급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허 교수는 “혁신기술은 희토류 등 핵심광물 사용이 불가피하고, 그걸 대체하기 어렵다”면서 “광물은 중국 의존도가 큰 데 수출통제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개별 기업 차원에서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고 짚었다. 이어 “바이든 정부에서 미국 주도의 공급망 논의가 활발했는데, 트럼프 정부에선 추가 논의가 없다”며 “핵심광물 안보 파트너십(MSP), 경제번영 네트워크(EPN) 등 복원을 한국이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일부 원자재는 국산화도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허 교수는 “포스코가 인공흑연을 생산하는데, 흑연은 중국에서 싼값에 살 수 있으니 공장 가동률이 20%대까지 낮아졌다”며 “이런 부분은 제도적 인프라로 제공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신흥시장 진출 등 수출선 다변화도 장기 과제다. 정치·외교 등 외생적 요인으로 수출 충격이 발생했을 때, 이를 다른 국가로 수출로 상쇄하는 ‘완충장치’ 마련 측면이다.
다만 초격차 기술 확보와 수입·수출선 다변화는 기업의 노력만으로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교수는 “기술력 우위를 점하려면 기술을 개발할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이건 교육정책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인력을 양성하면 기업은 그 인력을 채용하고 기술 투자를 늘려야 하는데, 한국은 여러 불확실성으로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기 쉽지 않다”면서 “조세제도, 노동제도 등을 새로운 환경에 맞춰 개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허 교수도 “‘상법’ 개정은 시대적 흐름에서 불가피성이 인정되지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제2·3조 개정안,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등은 경영과 기술 개발을 어렵게 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으로는 한미 관세협상에 따른 대미 투자를 공동 R&D와 상품·표준 개발, 공급망 안정화에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허 교수는 “일종의 글로벌 혁신생태계 조성인데,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하기는 어렵다”며 “정부가 외교를 활용하되, 미국에 투자할 2000억 달러(조선업 제외)를 AI·공급망 공동체에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준성 산업연구원 명예연구위원도 “관세의 영향은 업종별·산업별로 차이가 크다”면서 “조선업은 유리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다른 투자분은 국부 유출이 아닌 우리 성과로 환원하도록 전략을 잘 짜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