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 변화가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 인류 건강을 위협하는 ‘보건 위기’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피해를 입는 만큼 이들에 대한 우선적 보호와 대응 전략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경없는의사회(MSF)와 국회지속가능발전인도주의포럼은 3일 국회에서 ‘기후위기, 국경을 넘다-기후보건, 한국의 역할’을 주제로 간담회를 열고, 기후 위기가 단순한 환경 변화가 아니라 심각한 건강 위기임을 강조하며 협력적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하은희 이화여대 의과대학 환경의학교실 교수는 “사람과 지구가 함께 번영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구 보건(Global Health)’이라는 관점이 중요하다”며 “기후변화는 극심한 기상이변, 식량 불안정, 감염병 확산 등을 통해 인간의 생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이어 “지구 생태계와 인간 건강 사이의 상호 연결성을 인식하고, 지속가능한 개발 모델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 교수는 기후위기가 어린이, 고령자, 만성질환자, 저소득층, 농촌 지역 주민 등 취약계층에게 더욱 위협적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어린이는 면역체계가 미성숙하고, 체중 대비 공기·물·음식 섭취량이 많아 오염물질에 더 민감하다”며 “대기오염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 성조숙증, 기후 재난으로 인한 정신건강 문제 등 복합적 위험에 노출돼 있다.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닌, 그 자체로 매우 높은 취약성을 지닌 존재”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기후 불평등은 건강 불평등으로 이어진다”며 “저소득층은 홍수 위험 지역이나 공업단지 인근 등 열악한 환경에 거주할 가능성이 높고, 정치적으로도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만큼 보호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 교수는 “정의롭고 건강한 미래를 위해 정부, 학계, 시민사회의 공동 책임이 필요하다”며 “정부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법적·제도적 전략을 주도하고, 학계는 실효성 있는 솔루션을 제시하며, 시민사회는 환경 정의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정책 입안자에게 행동을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사 폰테베드라(Jessa Pontevedra) 국경없는의사회 의료총괄도 “기후위기는 단순한 응급 상황이 아니라 구조적인 공중보건 위기”라고 진단했다. 그는 “의료 접근성이 낮은 지역일수록 기후 충격에 더 큰 피해를 입는다”며 “단순한 감염병 대응을 넘어, 물, 위생, 에너지 등 공중보건 인프라 전반의 복원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략이 전환돼야 한다”고 밝혔다.
폰테베드라 총괄은 “기후위기는 예측 불가능하다. 지속 가능한 대응을 위해 조기경보 시스템을 도입하고, 의료물자 사전 확보와 질병 감시를 재난 위험관리 체계에 통합해야 한다”면서 “많은 국가가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채 기후 적응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기후 비상사태는 곧 건강 비상사태이며, 건강이 대응 전략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해관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는 “기후위기로 인한 환경 변화는 지구 전역에서 균일하게 발생하지 않는다”며 “취약한 지역, 시기, 인구 집단에 집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는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한국의 기후 정책 성적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2023년 국제 기후변화대응지수(CCPI) 평가에서 한국은 67개국 중 64위를 기록했다. 그는 “우리는 에너지를 생산하지도 않지만, 소비 중심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 산유국 다음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며 “부끄러운 성적표”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보건의료 분야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전체의 4.3%를 차지하는 데 반해 한국은 5.3%로 높다”며 “보건의료계 역시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실질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건강 위기를 불러온 기후 문제에 의료계도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엠마 캠벨(Emma Campbell) 국경없는의사회 사무총장은 “기후변화는 더 이상 환경 문제에 그치지 않고 심각한 보건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인류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며 “기후위기는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치지만, 특히 사회경제적 조건이 취약한 계층에 더 큰 피해를 안긴다. 이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캠벨 사무총장은 “MSF는 전 세계 70여 개국에서 활동하며, 기후 변화가 현장의 의료 인력과 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생히 목격하고 있다”며 “기후 위기 속에서 인도주의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국가로서 한국이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